[한경에세이] 낯선 여의도의 앨리스

입력 2020-09-01 17:35   수정 2020-09-02 00:05

나른한 오후,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든 채 “늦었다”며 뛰어가는 토끼를 발견한 앨리스는 굴속으로 따라 들어간다. 병에 담긴 음료를 마시자 몸이 작아지고, 쿠키를 먹자 다시 커진다. 놀란 앨리스가 눈물을 흘리자 순식간에 깊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지고, 그 위로 떠다니는 병을 집어 마시니 또다시 작아진다. 그리고 물결에 휩쓸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다. 어릴 적 읽은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20년 전, 창업 후 제품 판매를 위해 여의도를 여러 번 방문했다. 당시엔 호기심으로라도 고개를 돌려 국회를 관심 있게 바라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앨리스와 달리 나에게 국회를 안내할 인생의 토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지금 나는 낯선 여의도에서 토끼의 안내 없이도 하루하루 숨 가쁘게 지내고 있는 앨리스가 됐다. 정보통신기술(ICT) 벤처기업인으로 20년을 살아온 그 결과 산업계 대표로 여의도에 둥지를 틀게 된 내게 정치는 ‘어드벤처’의 시작이다.

가슴 벅찬 모험의 첫걸음부터 장애물을 발견했다. 제21대 국회 300명의 국회의원 중 이공계열 출신은 학부 기준으로 46명, 전체의 15%다. 여성의원 비율인 19%보다도 낮다. 이 가운데 전자·기계 등 공학 부문이나 수학·물리학을 전공한 의원은 21명, 전체의 7%다. 다른 8%는 원예·의류·소방·농업·생물·간호 등 이학적 사고에 기반한 비공학계열이다. 의원당 9명씩, 총 2700명의 보좌진조차 대부분 정치학, 외교학, 행정학 등을 전공한 문과 출신이다. 이뿐인가? 국회 정치부 기자들도 문과, 당직자도 대부분 문과 출신이다.

반면 나는 평생을 이공계의 시각으로 살아왔다. 학부에서 수학을, 석·박사 과정에서 암호학을 전공한 뒤 ICT 기업을 운영해온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문과생들에게 포위당한 이상한 나라의 이과생 앨리스가 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는 ‘왜 여의도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사고하지도, 업무 프로세스를 정립해 정답을 내지도, 시작한 일을 완결하지도 않는 걸까?’ 하는 ‘이과적’ 궁금증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과거 100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큰 변화가 10년 내에 이뤄질 것이다. 우리가 주도권을 잃었을 때 다가올 위험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미래 신산업을 육성하고 급변하는 세상에 맞는 입법·정책 활동을 국회가 선도해야 하는데, 국민의 대표 중 이공계 출신의 수가 이렇게나 적은 것은 큰 문제다.

이제는 정치도 과학과 ICT에 기반을 둬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목소리와 세상의 변화를 정책에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한다. 국회 구성원 중 이공계 비율을 의도적으로라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회에서도 ‘테크 트랜스포메이션’이 시작돼야 한다. 낯선 여의도에 선 앨리스의 어깨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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