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 가득 일렁이는 '디지털 나무'의 사계절 약동

입력 2020-09-06 16:34   수정 2020-09-07 10:51


커다란 분홍색 물방울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 뒤로는 탯줄이나 창자 또는 혈관처럼 보이는 붉은색, 청색, 연두색 등의 가닥들이 복잡하게 얽힌 채 일렁이고 넘실댄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꼬였던 매듭이 풀리기도 하고 커다란 방울이 확대경 역할을 하면서 복잡한 가닥들을 더 크게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의 영상미디어 설치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62)의 2018년 작품 ‘레터널(Retinal) 1’이다. 스타인캠프가 이듬해 제작한 ‘레터널(Retinal) 2’에서는 물방울과 가닥들이 분홍색 대신 청색 톤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색채와 추상적 이미지들이 묘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 서울 지하 1층 전시장의 커다란 벽면을 이 두 작품이 가득 채웠다. 각각 3분20초 길이의 영상은 눈 속 망막 정맥의 반투명하고 굴절되는 모습을 운동감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미국 건축가 스티븐 홀이 2018년 설계한 캔자스시티 넬슨엣킨스 미술관의 한 빌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스티븐 홀이 빌딩 창문을 ‘렌즈’라고 부르는 데서 착안해 망막 정맥을 모방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3차원(3D) 애니메이션 개척자로 꼽히는 스타인캠프의 개인전 ‘소울스(Souls)’가 리안갤러리 서울과 소격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디자인 미디어아트학과 교수인 그는 디지털로 자연을 묘사하는 작가다. 3D 애니메이션과 뉴미디어를 이용해 꽃과 나무, 하늘, 시공과 다양한 유기적 형태를 특정한 장소에 맞게 설치하는 작업을 해왔다.

리안갤러리에서의 전시는 2010년, 2014년에 이어 세 번째다. 망막을 다룬 두 작품 외에 전통적 정물화를 디지털로 재해석한 ‘스틸라이프(Still-Life) 4’, 나무의 사계절을 통해 시간과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주디 크룩(Judy Crook)’ 시리즈 두 작품 등 총 5점을 선보이고 있다.

망막 작품 반대편 벽에 비춰진 ‘스틸라이프 4’는 사과, 키위, 오렌지, 딸기 등 형형색색의 과일과 꽃들이 천천히 유영하듯 움직이며 화면을 가득 메운 올해 신작이다. 지난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수평의 축’ 기획전에서 선보여 주목받은 ‘스틸라이프(Still-Life) 3’(2019)의 후속작이다. 삶의 허무를 표현했던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생의 환희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과일과 꽃, 나뭇잎들의 우아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불안했거나 들뜬 마음이 차분해진다.

‘레터널’ 연작과 교차 상영되는 ‘주디 크룩’ 연작(12, 14)은 탄성을 자아낸다. 커다란 나무가 바람에 일렁이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안 꽃이 피고, 잎이 돋고, 무성해진 잎들이 단풍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모두 낙엽으로 졌다가 다시 꽃이 피고 잎이 돋는 순환의 과정이 사실적인 동시에 환상적이다. 계절에 따라 쉼없이 변화하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시간에 따른 자연의 순환을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은 작가가 대학 시절 큰 영감과 영향을 받았던 색채이론 교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리만머핀 서울에는 세 점이 설치됐다. ‘블라인드 아이(Blind Eye) 4’는 바람에 움직이는 자작나무와 잎사귀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 2018년 스타인캠프의 주요 개인전이 열린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의 자연환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나무들이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흔들릴 때마다 비처럼 날리는 잎들이 인상적이다. 작품 제목은 자작나무의 검은 점들이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였다.

바닷속에서 생명체가 탄생하던 태곳적 모습을 표현한 수중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 ‘프라이모드리얼(Primordial) 1’, 데이지꽃을 엮어 만든 화환이 부드러운 바람에 간지럼을 타듯 움직이는 ‘데이지 체인 트위스트 톨(Daisy Chain Twist, tall)’은 시공의 경계를 넘어 몰입감을 전한다.

전시장에서는 관람객이 영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돼 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품과 기술,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몰입하게 하려는 게 작가의 의도다. 전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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