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혁명세력들은 왜 서울을 택했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9-13 08:00  



조선 건설 세력은 왜 서둘러 천도를 결정하고, 한양을 수도로 선택했을까. 수도의 선택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백성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세계 역사에는 수도를 잘못 선택해 멸망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있다.

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이들의 천도 결정은 조선의 백성과 역사,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신세력들은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들과 권력, 토지 및 자원의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게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도시의 체계와 성립 조건

수도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왜 한양을 선택했을까?

수도의 위치와 체계는 정치·군사·경제·문화·사상 등의 요구에 부응해 선택되고 형성된다.

첫째, 교통과 통신망이 발달한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中心地)로 중앙 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둘째, 전 근대에는 모든 권력과 기능이 수도로 집중되는 만큼 안전한 방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셋째, 물자의 집결이 편리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중심지 역할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테네 등 폴리스나 중국의 난징·카이펑·항저우·베이징, 일본의 오사카·에도 등은 수도이면서 상업 도시, 항구도시였다.

넷째, 중요한 문화의 생산지와 집결지이며, 소비지(수요)이면서 공급지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신앙의 중심이고, 사상적인 의미도 부여해야 한다. 고구려는 수도인 홀본·국내성·평양성에 시조묘 등을 설치했고, 백제와 신라도 이와 유사했다. 수도는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고, 국가 정책에 근거해 선택하고, 건설해야 한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한양의 수도로서의 적합성?

그렇다면 한양은 수도로서 어떤 자격을 갖췄고, 어떤 시스템으로 구성됐을까?

서울 지역의 중요성과 수도의 자격은 역사가 증명한다. 백제는 500년(기원 전 18년~475년) 동안 수도로 삼았고, 고구려와 신라도 중요시 했다. 고려는 남경을 건설했고, 1356년(공민왕 5년)에는 천도 후보지로 삼았다. 실제로 한양에 성과 궁궐을 건설하는 시도까지 했다. 승려인 보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면 16개 나라가 조공을 바친다는 도참설을 공민왕에게 주장했다.

조선도 한양을 수도로 선택할 때 풍수지리설을 염두에 뒀다. 개경은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亡國)의 기지(基地)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의 영향으로 서둘렀다는 주장(이병도)도 있을 정도다. 천도의 주체인 정도전과 무학의 논쟁을 보더라도 한양을 선택하는 일에 풍수 사상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해’의 존재를 높게 평가하고, 편서 계절풍 지역이며,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남만주와 한반도에는 풍수지리에 적합한 터들이 흔하다. 다만 산과 강의 방향과 배열, 각도 등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양은 둘레를 내사(四)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과 외사(四)산(용마산·덕양산·관악산·북한산)이 겹으로 에워싸고, 물길이 안으로는 청계천, 밖으로는 동쪽에서 서쪽 바다로 흐르는 한강이 싸고돈다. 약간의 비보만 더하면 이론적, 수리적, 도형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신지배층인 성리학자들에게는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성리학적인 논리에 알맞아 이상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양은 경관이 수려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했다는 관념적인 찬사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수도 선택의 우선순위는 백성들의 안위와 생활을 보장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건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도(京都)는 지세의 훌륭함은 동방의 으뜸이요, 천연의 요새지이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한양은 북방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졌고, 내륙에 위치해 해양공격에도 방어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며, 산들이 겹겹으로 막아서 비교적 안전한 환경이다. 태조가 후보 지역인 무악(신촌 일대), 한양(서울 사대문 안), 도라산(판문점 근처)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을 때, 조준 등은 한양이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군평(均平)하고 수륙의 교통이 잘 되는 곳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라고 평가했다. 태조 자신도 한양을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리수(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태조실록》)’.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해와 백두대간을 잇는 한강 수로망을 이용해 쌀 등의 특산물 등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조운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소작료, 땔감과 공공건축에 사용될 재목, 소금, 생선 등을 보급 받았다(최완기, 《조선후기 선운업사 연구》). 한반도는 지형이 험한 데다가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한강 수로망에 크게 의지했다. 한양의 한강가에는 2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고, 몇 곳에는 창(창고)이 존재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곡식 등의 물품들은 광흥창(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산들은 군자강창에 보관했다(《한강사》). 그러나 규모나 시설, 역할 등으로 보아 상업항의 기능은 못했고, 개경과 비교하면 해양무역과 연결되는 항구의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한양의 한계와 신수도 건설 시기에 대한 의문

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려면 시설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윤명철, 《수륙도시 서울의 역사와 미래》).

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세종대왕은 도성을 개축했고, 수군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귀화한 왜인과 유구(오키나와)인들을 동원해 전선을 개량해 양화도(양화대교 아래)에서 시험운항도 했다. 하지만 한양의 기본적인 한계들을 해결하는 시도들은 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런데 신수도를 건설한 과정과 시기가 과연 적합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1394년 8월에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후 1395년에는 종묘와 경복궁을 완공했고, 사대문과 궁궐 성곽들도 빠른 시간 안에 건설됐다. 북한산성은 둘레 약 18km에 높이 15척(4.5m)의 석성과 토성인데, 1396년에 축성됐다.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에 완성됐다. 훗날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국가재정을 파탄 내고, 백성들의 원성으로 자신이 몰락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신수도 건설은 엄청난 경제력을 투자하고,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한 대역사였음이 분명하다.

조선 건국 당시는 정변한 직후라 민심이 불안했고, 생활도 불안정했다. 왜구는 수도를 한창 건설 중인 1393년~1397년 사이에만 무려 53회나 침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천도를 강행했다면 고려가 남긴 경제력과 방어력이 충분했거나, 아니면 엄청난 국고의 손실과 안보 위협을 무릅쓴 채 강행한 꼴이 된다.

한양은 500년 동안 조선이 방어적 습성을 갖고, 내부 지향적인 정치와 폐쇄적인 경제를 유지하는 체제로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일제의 경성부로서 35년 동안 지배와 수탈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서울은 약소국인 한국을 60여 년 만에 경제력이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성공한 나라로 만드는 데 핵심역할을 했다. 자연과 풍수는 변화가 없었고, 오로지 변화된 국민과 시민들의 의식과 무한한 노력, 실용적인 정책 덕분이다.

수도의 선택은 정권의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백성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므로 실용성, 국제질서, 국가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공동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합의와 책임의지의 점검이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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