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세상을 바꾸는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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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0-15 09:30   수정 2020-10-22 13:43

[여기는 논설실] 세상을 바꾸는 경제학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윌슨, 폴 밀그럼 교수(미국 스탠퍼드대)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의 통보 전화를 스팸으로 알았다고 하고, 새벽 2시에 잠옷 차림으로 공동수상자이자 후배 교수의 집을 찾아 소식을 알렸다는 얘기가 TV 리얼리티쇼 수준이다. 경매이론을 발전시켰다지만, 정작 자신은 이베이에서 스키부츠를 경매로 사본 게 유일한 경험이라고 소개하는 진솔한 면모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공짜로 나눠주던 주파수를 경매로 판매할 수 있게 미국 정부를 자극해 1994~2014년 10년간 1200억달러 규모의 재정수입이 늘어나는 데 기여했다. 한 평생 연구에만 정진해온 소박한 학자들이 현실 경제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꾼 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한계혁명, 케인즈혁명, 현대화폐이론(MMT)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바꾼(내지 바꾸고 있는) 경제학의 역사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좀더 현실감 있고 피부에 와닿는 경제학 아이디어 몇가지를 소개해본다.

◆게임이론과 행동경제학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게임이론이다. 한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미치는 상호의존적, 전략적 상황에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1994년 존 내시가 게임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후 이 분야에서 세 차례나 수상자가 나왔다. 그 시작은 폰 노이만(1903~1957)과 오스카 모르겐슈테른(1902~1977)이 1944년 펴낸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이란 책에서 비롯됐다.

이후 금융·보험·통신·물류·농업 등 산업 분야 뿐 아니라 정치와 국방, 재해대비 등에서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기업 단위로 내려오면 과점기업은 물론 독점기업들까지 잠재적 경쟁기업의 존재를 감안해 투자 의사결정과 가격정책을 짜는 데 게임이론을 응용한다.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경쟁촉진을 위한 정부 부처들도 이런 기업들의 전략을 게임이론에 근거해 분석하고 있다. 국내에선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개인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쏠림현상에 주목했다. 경제주체들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과는 딴 판이고, 결과적으로 그릇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이 교수는 게임이론을 토대로 금융시장의 가격 폭락 현상을 설명했다.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의 거장' 리처드 세일러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1945~)는 미래보다는 당장의 이익을 중시하는 인간의 특성을 이용해 '저축 플랜'을 설계, 미국을 빚더미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퇴직연금인 '401(K) 플랜'이라는 세제혜택 조항을 세법에 규정해 근로자의 저축률을 끌어올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특정 행위를 강요 또는 금지하지 않고도 선택 조건을 변화시켜 자연스런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너지(nudge)도 세일러의 동명의 책 출간 이후 세계 각국의 행정과 기업경영에 응용되고 있다. 계단 이용을 늘린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의 피아노 계단, 건강한 식습관 형성을 위한 학교 급식순서 변경 등이 그런 예다.
◆래퍼곡선과 불균형 성장이론


아더 래퍼 전 시카고대 교수(왼쪽)가 작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수여 훈장인 '자유메달'을 받고 트럼프와 악수하고 있다.

경제학과 정책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휴지(냅킨)에 그린 래퍼곡선'이다. 경제학자 아더 래퍼(1940~)가 1974년 미국 워싱턴의 한 식당에서 저명 언론인, 정치인 등과 이야기하다 세율이 조세수입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며 그렸다는 스토리다. 조세수입이 적정세율에 이를 때까지는 늘어나다가 그 지점을 지나면 오히려 줄어들어 엎어놓은 사발 모양의 '역(逆)U자' 형태를 띤다는 가설이다. 실제로 감세정책을 편다고 이론처럼 조세수입이 늘어날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이를 과감하게 채택해 1980년대 미국 경제 성장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공급경제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레이건의 결단이 없었으면 현실 적용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관련 지을 수 있는 현실 적용 예도 있다. '빈곤의 악순환'이란 개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래그나 넉시(1907~1959)는 경제성장에서 최초의 자본형성이 중요하다고 봤다. 한 시장의 집중도를 알려주는 허핀달-허시만 지수로 유명한 앨버트 허시만(1915~2012)은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는 '불균형 성장이론'을 주창했다.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큰 산업에 우선 투자하는 게 효과적이란 것이다. 결과적으로 돌이켜보면 196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부가 이들의 이론을 결합해 현실에 적용한 셈이 됐다. 부유층의 사치성 수입품 구매 억제, 강제저축, 외자도입으로 국내 자본축적의 전기를 마련했고, 수출·중화학공업·대기업중심 경제개발로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처방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이슈의 연구 열기가 뜨거워졌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좌파적 이론 기반에서 스타가 되기도 했지만 작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 부부(MIT 교수)도 못지 않다. 이들이 기존의 상식과 학계의 주장에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이란 책도 눈길을 끈다. 현실과 괴리된 경제학 이론에 대한 회의가 그만큼 컸다는 얘기일 수 있다.

이들은 예를 들어, '못 사는 나라의 이주민이 국내에 많이 유입되면 일자리가 줄어들까'라고 책에서 묻는다. 그리고는 미국 마이애미 사례를 들어 오히려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고, 관리자급의 고임금 일자리가 늘어나고, 지역경제가 활성화된 경우도 있었다고 소개한다. 1990년대 중후반 덴마크에서도 이민자가 유입된 도시에서 현지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보다 대체로 더 빠르게 성장한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196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GDP)와 그 이후 경제성장률 사이에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이 노동에 기울이는 노력은 최고세율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오히려 세금을 포탈, 회피하려는 노력이 최고세율에 반응하게 한다는 것이다. 1986년 레이건 정부가 세금을 감면했을 때 개인소득이 늘어난 것으로 나왔는데, 이는 실제 소득 증가 외에도 예전에 소득을 숨겼던 사람들이 소득신고를 성실히 한 영향도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방글라데시에서 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을 벌인 무하마드 유누스(1940~)도 언급할만 하다. 그가 1983년 설립한 그라민은행은 극빈자에 대한 무담보 대출을 하고도 대출 회수율이 99%에 육박해 흑자전환했다. 그는 그라민은행과 함께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렇듯 경제학은 상아탑에 갇혀 있기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내놓는 학문으로 발전할 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 경제의 여러 이슈들에 천착하면 세계적 연구 조류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연구자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운 일련의 비주류 학자들이 정권 핵심에 들어가 실험을 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허탈감도 이해 된다. 그러나 한국이든 미국이든 세계 어디든 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는, 현실 설명력을 가진 연구 성과들이 국내에서도 꾸준히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가 나면 또 한번 생각하게 하는 주제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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