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보고 레슬링에 빠진 이건희…27년간 삼성을 들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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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0-25 10:19   수정 2020-10-25 15:04

역도산 보고 레슬링에 빠진 이건희…27년간 삼성을 들어 올리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3남 5녀 중 일곱째였다. 남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늘 외로웠다.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한창 바쁠 때여서 세 살 때까지는 경남 의령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947년 5월 호암이 사업을 확장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옮기자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마산 대구 부산으로 피난살이를 다녔다. 그 새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다녔다.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큰형 이맹희 씨(전 제일비료 회장)와 열한 살, 작은 형 이창희 씨(1991년 작고)와도 아홉 살 차이가 났다.


부산사범초등학교 5학년 때 195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 지시에 따른 것이다. 당시 이맹희 씨는 도쿄대, 이창희 씨는 와세다대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인 이 회장은 대학생 형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이 회장은 1989년 월간조선 12월호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친구도 없고, 놀아줄 상대가 없으니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민감한 나이에 민족 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절실히 느꼈다.”


일본 유학 3년간 이 회장은 당시 대부분의 남는 시간을 집과 영화관에서 보낸다. 다큐멘터리 등 영화에 빠진 그는 유학생활 동안 1000여 편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하루 한 편 이상 꼬박꼬박 본 셈이었다. 똑같은 영화를 10번, 100번씩 보기도 했다. 일종의 천재들이 그렇듯 그는 무언가에 꽂히면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파고드는 버릇이 생겼다. 라디오 등을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는 취미도 생겼다. 대학 때 다시 일본에 돌아와 와세다대에 다닐 땐 당시 세계 최고로 발돋움하던 텔레비전, VTR 등 일본의 전자제품과 카메라, 심지어 자동차까지 분해하고 조립하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이는 전자산업, 특히 반도체에 대한 안목으로 발전한다. 삼성전자를 키운 통찰력은 그때부터 발현되기 시작한 듯하다.


이 회장이 애완견과 레슬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다. 일본 유학 때 프로 레슬러 역도산의 활약을 본 이 회장은 고교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다. 부모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을 하면서 청소년 이건희는 강한 투지와 끈기,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습득하게 된다.

그때 그는 몇 안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든다. 홍사덕 의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홍 의원에 따르면 이 회장은 당시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 최고의 부자였지만,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불량학생 자세로 달려가며 배고프다면서 군용천막 안의 즉석 도넛가게에서 도넛을 몇 개씩이나 먹어치우고, ‘아이스케끼’를 빨아먹던 학생이었다. 고집도 무척이나 셌다. 콧대 높은 여학생과의 데이트를 놓고 걸었던 내기에서부터 크게는 사업 구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과 행동은 문자 그대로 일수불퇴였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의 수준은 일반 고등학생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미국의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실상 나라를 좀먹는 존재다’는 등 특유의 넓은 안목으로 얘기해 홍 의원을 어리둥절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홍 의원 기억에 이 회장은 고교 때 벌써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인재경영의 바탕이 된다. 이 회장은 향후 임직원들을 뽑을 때 직접 면접을 6~7시간씩 하기도 했으며, S급 인재를 뽑아오라며 사장들을 다그쳤다. 1993년 임원들을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불러 신경영 강연을 할 땐 “인간미를 찾자, 뒷다리 잡지 말자”고 말을 시작했다. ‘임직원이 서로 믿고 힘을 합쳐 한 방향으로 가면 초일류 기업이 될 것’이란 게 골자였다. 어떻게 비용을 아끼고, 어떤 제품을 개발할지가 아니었다. 삼성이 이 회장의 강의를 요약해 교육용으로 만든 ‘신경영’ 책자는 236페이지 중 처음 96페이지가 인간미, 도덕성, 에티켓에 관한 내용이다. 이 같은 인간 중심의 접근법은 삼성을 바꿨다. 삼성은 기본과 매뉴얼을 중시하며, 위기 때 힘을 모은다.

그는 한 손을 묶고 24시간을 견딘 뒤 “극복해봐라. 이 게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신경영 책자에서 밝히기도 했다. 인간 본성과 변화에 대해 알려고 자신을 교보재로 실험한 것이다.

이처럼 이 회장은 시쳇말로 기인이다. 이 회장은 고교 졸업 후 연세대 입학이 확정됐지만, “외국으로 나가라”는 호암의 지시에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수학한다. 1965년 조지워싱턴대에 다닐 땐 당시 중앙일보 회장이던 홍진기 씨(1986년 작고)의 장녀 홍라희 씨와 맞선을 본다. 다음해 터진 ‘한비사건’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1966년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한 그는 1967년 결혼한다.

이 회장은 호암을 따라다니며 천부적인 직관력과 동물적 경영감각을 배운다. 또 장인이면서 중앙일보·동양방송 회장이던 홍진기로부터는 행정·법에 대한 개념, 사회 움직임에 대해 배웠다. 홍진기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서방은 그릇도 큰 데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니까 내가 그냥 쏙쏙 넣어주고 싶다.”

이 회장이 처음부터 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호암은 중앙일보 등 미디어를 맡길 생각이었다. 이 회장의 첫 직장이 동양방송이 된 이유다. 하지만 호암은 1977년께 마음을 바꾼다. 호암은 1977년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장남은 성격으로 봐 기업에 맞지 않아 손을 떼게 했다. 둘째는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을 맡길 수 없다. 따라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아들로 후계자를 결정했다. 각각 본인의 능력에 따라 행방이 나눠졌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 부회장(~1987)에 오른다. 후계자로 낙점됐지만, 이 회장은 말이 없었다. 그저 호암 뒤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때문에 당시 그의 족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러 기록사진에도 이 회장은 이 창업주 뒤에 말없이 서 있다.

다만 이때 단독으로 한 행동이 있으니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였다.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 회장은 오일쇼크 와중에서도 사재를 털어, 파산 직전이던 한국반도체의 50% 지분을 50만달러에 인수한 것.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선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이 회장은 미래가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판단해 자기 돈을 투자했다.

호암은 1983년 도쿄에서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이 회장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호암은 기술이 부족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탓에 반도체 사업은 삼성과 맞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아들이 수년 동안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결국 본인이 회장이 된 뒤 6년이 지난 1993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위에 오르는 뚝심을 보여준다.

1987년 호암이 세상을 등지자 회장으로 추대된다. 그룹 안팎에선 걱정이 많았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할 때만 해도 삼성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인 천주욱 창의력연구소장의 회고다. 워낙 말이 없던 사람이어서다. 왜 말이 없었을까. 이 회장은 1993년 8월 언론 인터뷰에서 “1982년 교통사고를 당해 한동안 진통제에 의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식물인간이나 마약중독이니 하는 얘기가 나돌았던 것 같습니다. 중상모략도 끼어들고 해서 계속 소문이 커졌죠. 내 건강은 직접 보면 알 것입니다. 기업이 1세에서 2세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거부 세력도 있게 마련인데, 거기서 그러한 얘기들이 번졌습니다. 회장에 취임한 게 1987년 말인데, 지난해(1992년) 이맘때가 돼서야 집안 정리가 대충 매듭지어졌습니다”고 밝혔다.

말문은 1993년 신경영 때 비로소 터졌다. 당시 열 두 시간을 쉬지 않고 강연하기도 했다.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20여년간 키워온 경영구상이 한순간에 분출한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불량은 암이다’ ‘양보다 질’ 등으로 유명한 신경영으로 삼성은 천지개벽을 했다. 산업화시대의 추격자에서 디지털·모바일 시대의 패권기업이 됐다.

이 회장에게 어려움이 닥친 건 1999년부터다. 1999년 폐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수술을 받았다. 완치는 됐지만, 이후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는다. 2000년에는 본인이 가장 사랑했던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하게 된다. 자동차업계의 반대를 뚫고 각서까지 써가며 진출했던 사업이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다른 그룹과의 ‘빅딜’마저 실패한 탓이다. 이 회장은 사재 2조8000억원을 내놔야 했고 결국 프랑스 르노에 매각해야 했다. 2006년에는 삼성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1년여 이상 삼성특검 조사가 끝난 뒤 기소가 돼 2008년 4월22일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 2년 가까이 칩거한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된 뒤 2010년 3월24일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한다.

이 회장은 원래 출근을 하지 않던 사람이다. 1990년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회사에 나오면 사장들이 눈치를 보느라 엉뚱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임직원들도 경직된다”며 좀처럼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왔다. 그러던 그가 2011년 4월21일 새벽 6시 출근을 한다. 애플이 삼성전자가 아이폰을 베꼈다며 특허소송을 전 세계에서 제기한 직후다.

이 회장이 출근경영을 시작하며 삼성은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인다. 감사를 받은 한 계열사에서는 임직원들이 협력업체로부터 향응을 받은 일이 밝혀져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사장도 옷을 벗었다. 삼성의 컨트롤 타워인 미래전략실의 인사팀장과 경영진단팀장도 전격 교체됐다. 이런 위기감은 2012년 애플을 넘어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에 오르는 저력으로 작용했다.

이 회장은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평생 철저한 경쟁의식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2012년 큰형인 이맹희 씨가 상속재산분배소송을 낸 뒤 “건희 건희 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도 삼성 후계자가 주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게 삼성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이부진-이서현 사장의 손을 잡고 다니며 힘을 실어준 건 이 부회장의 계속적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서란 해석이 나온다.

이수빈 기자 bad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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