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타당성 검토 시늉조차 포기한 '예타 면제'

입력 2020-12-09 17:18   수정 2020-12-10 00:21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는 대규모 국가예산사업 시행 전에 사업의 재정적 타당성을 예산당국이 대충(예비적으로) 검증하는 제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만이 예타를 제도화하고 있다. 세계은행(WB)이 예타를 공공정책의 성공사례로 인정한 바 있다고 하지만, 실상을 모르고 내놓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현실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예비’타당성조사 이후 사업주체인 부처의 엄중한 ‘본’타당성조사(이하 본타)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 재정당국의 검증인 예타만 넘기면 부처는 사업을 예외 없이 밀어붙인다.

예타를 통과한 사업을 대상으로 예타와 본타, 실제 사업의 실질적인 성과를 비교한 분석도 전무하다. 엔지니어링 기술 하나 없는데도 ‘우리 동네 허수아비가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자랑하면서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격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업은 예타에서 예상한 재정투입보다 훨씬 더 많은 지출을 초래했고 사업의 효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예타의 순기능은 무엇인가? 타당성이 극도로 낮은 사업들을 배제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사업을 밀어붙이는 정치적 압력을 견뎌내는 최후의 보루였다. 상식과 최소한의 토론이 가능한 문명사회라면 그런 사업들을 거론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 상식과 최소한의 토론이 없어서 가끔 예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민낯인 것이다.

예타는 이렇게 부끄러운 제도다. 그나마 이런 예타를 면제하면 합리성·타당성을 지향하는 시늉조차 포기하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단계로 가자는 것이다. 예타 면제의 사유로 예타 기간 단축, 국가균형발전 반영 등이 거론된다. 예타 소요기간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예타의 대상인 사업계획은 매우 거친 개념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분석이 애초에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예타 면제로 낭비하는 돈이 1000억원이라면 예타 소요기간을 줄이는 데 드는 비용은 추가 2억원이면 충분할 것이다. 제도 도입 초창기에 비해 예타 소요기간을 줄이지 못한 것에 대해 재정당국과 예타조사담당 당국은 반성해야 한다. 조사분석역량을 꾸준히 축적하고 확충하지 못했다. 국가균형발전의 관점도 기존 예타 방법론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 ‘분배적 가중치’는 매우 보편적인 기법이며 그리 어렵지 않게 개발할 수 있다.

이번 정부에서 예타 면제 사업으로 결정됐거나 거론되고 있는 주요 사업은 남부내륙철도 건설, 문현 벤처컨벤션센터 건설, KTX 전라선 건설, 가덕도 신공항 건설 등이라고 한다. 지역별로 또 정치적 정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배분돼 있다. 여야를 망라한 정략적 담합의 흔적이 짙다. 게다가 예타 면제 사업규모의 대략 70%인 80조원가량이 사실은 이런저런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다.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할 정치·경제·사회의 급변이 코앞이다. 재택·유연근무가 일상인데 주말 교통혼잡을 도로확충으로 잡는다?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클릭 한 번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예술회관을 동네마다 지어야 한다? KTX와 교통망의 혁명적인 연계가 눈앞에 있는데 엄청난 환경파괴를 하면서 공항토목공사를 시작한다?

답답하고 암담한 마음이다. 빅데이터에 입각해 스마트한 플랫폼으로 기존의 SOC를 연결하고 공유하고 융합하는 데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뻘쭘’하게 한두 개 더 건설하는 것보다 그 효과가 100배는 더 클 것이다. 이미 축적된 데이터에 아주 간단한 실시간 센싱과 클라우딩, 스마트 알고리즘을 결합하면 기존 SOC의 활용도와 맥락성 및 접근성 등은 현격하게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 균형발전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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