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거의 모든 것들의 정치화

입력 2020-12-23 17:58   수정 2020-12-24 00:26

1년을 12조각 피자 한 판에 비유하면, 올해는 겨우 한 조각 베어 물었다가 코로나에 다 빼앗긴 꼴이다. 기약 없는 백신으로 인해 내년에도 몇 조각이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벼랑끝인 자영업자, 대리기사 등은 전국 봉쇄령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알바, 임시직, 일용직, 실업자, 취준생, 프리랜서 등 노동시장 약자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정부가 자랑하던 K방역도, K경제도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이 혹독한 ‘불만의 겨울’에 속속 드러나는 권력자들의 내로남불은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본 가치관마저 허문다. 집값·전월셋값이 더 뛰고, 세금·건보료가 덩달아 오를수록 국민 스트레스지수도 치솟는다. 위안부 할머니 생일파티라고 둘러대며 그들이 들이켠 붉은 와인에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이란 춘향전 시구를 떠올린 이들이 적지 않다. 민생의 임계점, 민심의 비등점이 바짝 다가온 듯하다.

그런데도 집권세력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지지율 하락이 ‘미진한 개혁’ 탓이라며 외려 더 밀어붙일 기세다. 감히(!) 정권을 거역한 검찰총장은 불문곡직 쫓아내고, 국제사회가 뭐라든지 북한에 전단을 보내면 감옥에 넣고, 불가항력의 사고여도 경영자를 살인범 수준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검찰개혁’을 끝내면 다음은 언론, 종교, 사학 등을 손볼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눈치 빠른 관료집단과 금융계는 알아서 엎드린다. 이 틈에 줄 대기 바쁜 기회주의자도 많다.

민심 이반이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고(go)!’라는 배짱과 오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막스 베버의 구분을 적용하면 책임과 성과를 중시하는 ‘책임윤리’는 애초에 없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신념윤리’로 똘똘 뭉쳐서인가. 그 목표란 것은 또 뭔가. 그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인가. 권력을 쥐고, 과거를 지배하고, 20년 더 집권한다는 큰 그림인가.

이런 밑바탕에 ‘공부(성과) 안 해도 시험(선거)은 자신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선거 4연승’은 단순히 운이나 우연이 아니다. 내년 재·보궐, 후년 대선에도 필승의 반전카드가 있다고 한다. 여권 실세의 “보수 분열 전략을 다 세워놨다”는 말도 돈다. 현금 살포와 정치 사면 카드로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의 ‘성채’는 견고하다. ‘40%의 콘크리트’는 깨지지 않았다. 집값 오르고, 소득 늘고, 워라밸 즐기며, 자리도 안정적인 ‘성(城)안 사람들’이 열성 지지층이다. 여기에다 “대통령이 안쓰럽다”는 감성적 팬덤도 여전하다. 지난 대선처럼 ‘1 대 다(多)’ 구도면 콘크리트 40%로도 필승인 셈이다.

여권에 정통한 선거전략가는 “집권세력은 추측이나 짐작이 없고, 주고받기가 철저하다. 보수는 시멘트만 버무리면 콘크리트가 되는 줄 알지만, 이들은 모래 자갈 물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콘크리트가 훨씬 단단하다”고 설명했다. ‘끼리끼리 밀어주기’는 성남시의 부정채용 내부고발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구청장이 바뀌면 각종 납품처만 200곳 이상 바뀐다지 않는가. 이제는 이념보다 더 끈끈한 생계 공동체에 가까운 것이다.

정권 핵심인 586운동권은 스무 살 때부터 대중 동원과 선거의 기술을 체득한 집단이다. 쉽고 감성적인 언어 프레이밍에 탁월하다. ‘조국 수호’ ‘기업 살인’ ‘쉬운 해고’만큼 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이 집권한 지난 3년 반은 거의 모든 정책과 입법의 잣대가 ‘표’였다. 소수가 반발해도 상대적 다수에게 어필할 수 있으면 뭐든 가리지 않는다. 소주성, 부동산, 탈원전, 방역 등이 모두 정책이 아니라 정치로 변질된 이유다. 백신 지연으로 국민이 불안해해도 대통령 ‘이미지 경호’가 먼저다.

불행히도 이 정부에는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지식과 인재풀이 없다. 경제가 버티는 건 순전히 기업들이 다진 펀더멘털 덕인데도 ‘정치 일진’들은 온갖 ‘이지메’를 가한다. 국민이 순응하면 회유와 당근으로, 반발하면 감시와 처벌로 제어하는 통치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좌파 논객들조차 보다 못해 ‘민주 건달(홍세화)’ ‘싸가지 없는 정치(강준만)’라고 비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2020년이 저물어간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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