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100년 만에 살아난 문예지 '백조'의 숨은 주역들

입력 2021-01-01 17:50   수정 2021-01-02 00:12

올해 탄생 121주년을 맞은 시인 홍사용(1900~1947). 경기 화성 출신인 그가 서울 휘문의숙(현 휘문고)에 입학한 것은 16세 때인 1916년이었다. 이후 그는 시와 소설을 쓰던 박종화(1901~1981) 등과 함께 등사판을 빌려 잡지를 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19년 3·1운동에 앞장선 그는 일제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그에게 비애와 좌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무렵 배재학당(현 배재고) 출신의 동년배 소설가 나도향(1902~1926)과 박영희(1901~?)를 만났다. 두 사람도 3·1운동 실패 후 절망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야유회를 함께 떠난 이들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잡지를 발행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홍사용이 6촌형 홍사중, 지인 김덕기의 도움으로 문화사(文化社)를 설립하고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기로 했다. 사상잡지 ‘흑조(黑潮)’도 간행하기로 했다. 시인 이상화(1901~1943)와 소설가 현진건(1900~1943) 등이 동인으로 합류했다.

편집인은 홍사용이 맡았지만 발행인을 누가 맡느냐가 골치였다. 일제의 검열과 간섭을 피하려면 발행인을 외국인에게 맡겨야 했다. 결국 미국인 선교사이자 배재학당 교장이던 헨리 도지 아펜젤러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1921년 말 편집을 마치고 이듬해 1월 9일자로 ‘백조’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호에는 홍사용의 서시 ‘백조(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해 박종화 시 ‘밀실로 돌아가다’, 나도향 소설 ‘젊은이의 시절’ 등을 실었다. 그해 5월 2호(발행인 미국인 선교사 보이스 부인)를 낸 뒤로는 후원금이 끊어졌다. 홍사용이 시골 땅을 팔아 이듬해 9월 3호(발행인 러시아인 페루 페로)를 겨우 냈지만 이후 발행은 중단되고 말았다. 사상잡지 ‘흑조’는 출발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 동인지를 통해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같은 걸작이 빛을 봤으니, ‘백조’는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샛별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훗날 박종화는 당시의 낭만주의 사조와 관련해 “우리들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는 환경에 있고, 3·1운동을 치른 뒤 온 절망이 자연히 이 길로 젊은 문학도를 끌고 들어가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 배경을 보면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10세 전후로 을사(乙巳)조약과 경술(庚戌)국치를 겪은 이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있었다. 의병과 일제의 대치, 광복을 꾀하다 투옥된 선배들의 희생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와 내 집안 일이었다. 그 참담한 역사의 풍파가 이들을 조숙(早熟)과 한(恨)의 정조로 내몰았던 것이다. ‘백조파’와 ‘백조시대’라는 한 조류도 이렇게 해서 형성됐다.

잡지 표지는 동인 화가 안석주와 원세하가 그렸다. 창간호 표지에는 청자 형태 속에 전통 옷을 입고 생각에 잠긴 여성이 그려져 있다. 속표지에는 바닷가에 앉은 여인의 나신과 이를 내려다보는 아기천사가 배치돼 있다. 한국의 전통과 서구적인 분위기를 함께 살리려 애쓴 흔적이 동인들의 문학적 지형과 닮았다.

100년 전 이들이 만든 ‘백조’라는 거대한 물결이 한 세기를 넘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21세기 문학인들이 ‘백조’를 계간지로 복간하기로 하고 3호에 이어 4호를 발행했다. 옛 선배들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백조’를 “어두운 시대에 밝은 물결이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한 매개체”(김태선), “개인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을 경애한 작업”(권보드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왕복 승차권”(최가은)이라고 평가했다.

‘백조’의 탄생·소멸·부활을 보면서 문학의 근본 의미를 새삼 생각한다. 100년 전 흐름을 멈춘 줄 알았던 그 ‘물결’이 다시 흐르다니! 라틴어로 ‘종결’을 의미하는 ‘피니스(finis)’가 헬라어로 ‘목적(최고점)’을 뜻하는 ‘텔로스(telos)’이기도 한 것과 같은 이치랄까. 어렵사리 재탄생한 ‘백조’의 숨결이 영원하길 빈다.
'백조' 부활의 산실 노작홍사용문학관
‘노작(露雀)은 지금이나 그때나 고결한 선비다. 한 번 사람을 알아주면 몸이 부서져라 하고, 한 번 틀리면 돌부처다. 내 말 여간해서 남에게 안 하는 성정이요, 남의 말 시부렁거려 옮기지 않는 사람이다. 즐거이 민요를 읊조리며, 가장 득의처(得意處)는 향토정서였다.’(박종화)

노작은 ‘이슬에 젖은 참새’라는 뜻으로, 홍사용의 호(號)다. 시인의 호 중에서도 특히 멋스럽다. 그의 무덤이 있는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에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있다. 이 근처의 반석산 뒤를 끼고 흐르는 오산천은 아산만을 지나 서해까지 가 닿는다. ‘백조’가 창간된 100년 전에는 이곳까지 서해의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배들이 그려낸 하얀 물결이 백조(白潮)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이곳 관장인 손택수 시인은 “홍사용의 무덤은 저에게 왕릉이며, 저는 이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이라며 “제 시 쓰기의 여정이 동탄과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능참봉으로서 홍사용을 지키고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2018년부터 관장을 맡은 그는 홍사용이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활동한 극작가였다는 점에 착안해 문예지 ‘시와 희곡’을 창간했다. 이어 노작홍사용 창작단막극제를 개설했고, 최근에는 ‘백조’ 복간호까지 펴냈다. 그런데도 잡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숨은 주역’이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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