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사면의 정치학

입력 2021-01-03 18:09   수정 2021-01-04 09:26

5·18 당시 헬기사격은 ‘악의적 주장’이라고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작년 11월 1심에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자, “그를 왜 사면(赦免)해 줘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비난이 쇄도했다. 역사의 법정뿐 아니라 현실의 법정에서도 계속 처벌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군사쿠데타와 5·18의 원인 제공자인 전 전 대통령은 5·18특별법 제정 뒤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대선 직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김대중(DJ) 당선인의 특별사면으로 2년 남짓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다.

사실 DJ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서로에게 ‘사면’을 베푼 사이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1981년 사형까지 선고받은 야당 지도자 DJ가 사면·복권된 것은 1987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의 ‘6·29 선언’이 계기였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약속하는 동시에 DJ의 대선 출마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하지만 야권 단일화에 실패한 김영삼(28.0%)과 김대중(27.1%) 후보를 물리치고 노태우 후보가 36.6%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별사면은 국무회의 심의만 거치면 되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김대중 사면, 노태우 당선’ 예에서 보듯, 이 권한이 정치적 동기와 전략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새해 벽두부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카드’를 들고나와 정치권이 뜨겁다.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며 민주당이 입장을 신속히 정리하자 이 대표도 신중 모드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선 후보 선호도 3위로 떨어진 이 대표로서는 상당한 기대를 걸었을 ‘깜짝 제안’이어서 향후 추이가 초미의 관심이다.

야당은 “민심을 제대로 읽기는 했는데, 선거에 이용해선 안 된다”며 일단 선을 긋는다. 잠재된 친이·친박계의 갈등을 유발해 야권 분열을 노리는 정치공학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사면의 정치학’이 4월 재·보궐선거를 앞둔 정치권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예측 불허다.

기원전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면제도는 정적을 포용하고 사회안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해왔다. 대통령의 사면권이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에 부합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적지 않지만, 정치 보복의 고리를 끊을 수단인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뻔한 ‘선거공학’이 아니라면 사면의 순기능은 아직 유효해 보인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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