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황제 얼굴을 과일·채소로…경이로운 합성, 새로움의 함성

입력 2021-01-07 16:44   수정 2021-01-08 02:16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JJ 고든(1919~2003)과 미국 작가 조지 M 프린스(1918~2009)가 공동 개발한 시네틱스는 서로 관련이 없는 요소들을 결합해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아이디어 개발 기법이다. 둘 이상의 요소를 결합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synectics’에서 유래했다. 미술에서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조합해 창의적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시네틱스 기법의 적용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는 미술사에서 최초로 과일, 채소, 식물, 동물, 사물 등을 결합해 인간의 얼굴을 만드는 합성초상화를 발명한 업적을 남겼다. 아르침볼도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베르툼누스’는 그가 개발한 합성 기법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잘 보여준다.

그림 속에 과일과 채소, 곡식, 꽃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태의 인간이 등장한다. 인물의 얼굴과 몸을 자세히 살펴보면 양파, 옥수수, 올리브, 아티초크, 호박, 양배추, 사과, 배, 포도, 밤, 무화과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조합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놀랍게도 식물이자 인간인 복합초상화의 모델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국의 왕인 루돌프 2세다. 궁정화가인 아르침볼도가 절대권력자인 황제를 채소와 과일더미, 꽃밭으로 표현한 의도는 무엇일까? 루돌프 2세의 뛰어난 통치력으로 나라가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누리게 됐다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고대 로마신화에 나오는 계절과 식물, 변신의 신인 베르툼누스에 비유한 의미도 물질적 풍요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 초상화는 황제의 위엄과 공덕을 찬양하고 선전하려는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합성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인간의 통치력과 자연을 연관시킨 최초의 복합초상화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아르침볼도가 초상화와 정물화를 결합한 기상천외한 화풍을 발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창의적 활동을 후원하고 보상해주는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침볼도가 황금시대를 연 군주로 미화시킨 루돌프 2세는 실제로는 위대한 통치자가 아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과학, 인문학의 후원자이자 유럽에서 가장 값진 컬렉션을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수집가였다.

미래와 기술적 진보에 관심이 많았던 루돌프 2세는 프라하 궁정을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성지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쳤다. 유럽의 유명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 철학자, 인문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 의사, 마법사, 연금술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프라하 궁정으로 초청해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 문예부흥운동을 이끌도록 격려했다. 황제가 후원한 대표적 과학자는 황실 수학자로 임명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초 브라헤, 프라하에 천문대를 설립한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세계적 수준의 식물원을 만든 프랑스계 네덜란드 식물학자 찰스 드 엘클루스가 꼽힌다.

학문에 대한 탐구욕만큼이나 값진 예술품과 희귀한 물건들을 사들이는 황제의 수집욕구는 유럽에서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는 프라하 성 안에 ‘경이로운 방’으로 불리는 대규모 전시실(쿤스트카머)을 마련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르네상스인들의 흥미를 끄는 온갖 종류의 희귀물을 열정적으로 수집하고 진열했다. 비공개인 황실컬렉션을 궁정에 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에게 자유롭게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게 개방했다.

특히 황제는 아르침볼도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그가 궁정에서 일한 11년 동안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꽃피울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황제가 열린 사고를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물도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이론가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는 루돌프 2세가 아르침볼도에게 기발하고 재밌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구해서 이 초상화가 그려졌으며 합성초상화를 본 황제가 무척 즐거워했다고 증언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제작자 브라이언 그레이저는 “완전히 서로 다른 분야를 접목했을 때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가 나오듯, 나와 동떨어진 분야에 대해 배울 때 남들과 다르게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창의적 조합으로 탄생한 이 그림은 서로 다른 영역을 혼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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