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그들은 664년 대마도와 이키섬에 봉화 등 방어체제를 쌓고, 규슈 북부 해안(후쿠오카 지역)의 정청을 지금의 다자이후로 옮긴 뒤 곳곳에 성을 쌓았다. 다시 667년 백제의 달솔인 도훈?쇼(答春初)는 유민들을 지휘해 대마도의 아소만(淺茅灣) 옆 산꼭대기에 가네다성(금전성)을 쌍았다. 소위 ‘백제식 산성’이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는 신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변했으며, 우리 역사에서 이탈했다. 670년 왜국은 국명을 일본으로 변경했고, 통일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하지만 두 나라는 때때로 제한된 교류를 했다. 일본은 대마도에 ‘신라역어(통역관)’를 뒀을 정도였다. 그런데 9세기에는 신라 해적이 일본을 침공했으며, 894년에는 대마도를 두 차례나 공격했다.
13세기에는 왜구들이 등장해 고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세종 때는 이종무가 전선 227척에 병사 1만7285명으로 대마도를 공격했다. 하지만 조선은 회유책을 택해 식량 등 생필품을 하사하며 무역권을 주었고, 심지어는 관직까지 내렸다. 이 때문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우리 기록과 지도들이 많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영토였다. 즉 경제적으로는 우리, 정치적으로는 일본을 선택하는 ‘중간자’의 숙명을 갖고 반독립적인 역사를 유지했던 것이다.
대마도에 사는 왜인들에게 1000년 이상 괴롭힘을 당했던 우리는 누구인가? 은, 수산물 같은 자원의 보고이며 천혜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도대체 왜 ‘우리 영토’로 만들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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