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북벌론, 현실성 있었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1-01-17 08:28   수정 2021-01-18 15:41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떠올려 본다. 이후 이종무가 1419년에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의 꿈을 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 안주의 습성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후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또한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
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

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들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자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존주대의(청을 오랑캐로, 명을 정통으로 해 중화사상을 따른다)’와 ‘복수설치(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란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이조판서로 북벌을 추진했다.

북벌론은 백성들이 가진 왕과 양반체제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물론 이 정책의 긍정적인 점도 몇 가지 있다. 학자적 관료인 송시열은 ‘정치를 개선해 오랑캐를 물리친다(修政事以攘夷狄)’란 명분을 내걸고, 궁정사업과 토목공사를 줄여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세금을 줄이는 등 백성들의 삶을 중요시하는 정책들도 건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농사철에도 군사훈련에 투입됐고, 성벽과 개수공사 등에 동원되면서 농사에 차질이 많았다.

둘째, 효종세력들은 북벌정책을 실현? 또는 실천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까?

국내 환경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3만명의 전사자, 50만명 이상의 포로로 인한 군사력과 노동력의 막대한 상실, 전답의 파괴와 손실로 인한 경제추락과 국가재정의 부족 등은 전쟁 준비에 장애요인들이다. 또한 불안감과 염전 분위기의 증폭도 문제였다. 따라서 왕과 일부 양반권력자들을 빼놓고는 명분도 희박하고, 승산없는 전쟁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와 만주의 국제환경

국제환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남북분단과 6·25 전쟁 등 사건들처럼 우리 운명은 국제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1654년 당시 명나라는 멸망(1644년)한 지 이미 10년이 됐다. 물론 복명운동이 계속됐고, 1658년에는 남쪽에서 정성공이 10만명의 병력과 전선으로 남경 근처까지 공격했다. 북쪽 몽골 지역에서는 준가르 제국이 일어나 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희제가 등극하기 직전이었고, 통일 제국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또한 동아시아 세계는 이미 서양세계의 구심력에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의 발생과 과정에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세계의 역할이 있었고,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인 아담 샬 등의 선교사와 교류하면서 서양의 신사상을 체험하고, 발달된 과학과 기술문명을 접촉한 후에, 이를 이식하려고 시도했었다.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제조 등에 참여했고,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인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한편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의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은 청나라와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들이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 등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

가정해 본다. 만약, 만의 하나라도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나선정벌의 발발

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

북벌준비는 ’나선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전투력을 소진할 목적으로 조창 사용에 능숙한 병사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은 두만강을 넘어 1651년 1월에 모란강(牧丹江) 상류의 발해 상경성인 영고탑(영안현)에 도착해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했다.

연합군은 북상하다가 혼동강(송화강의 하류)에서 러시아군 400~500여 명과 7일간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청나라는 1658년에 다시 파병을 요청했고, 신유(申瀏)는 조총군 200명과 초관 60여 명을 거느리고 출진해 두만강을 건넜다. 영고탑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북상해서 6월 10일에 헤이룽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장(同江)시 외곽의 강위에서 10여 척의 선박을 타고 러시아 전선과 맞붙었다. 조선의 제안으로 화공을 가해 적선 12척 가운데 11척을 침몰시키고, 지휘관인 '스테파노프'와 병사 270여 명을 죽였다(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실증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는 전과를 얻었고, 북벌작전에 필수적인 교통망도 샅샅이 탐지했다.

나는 나선정벌을 활용하는 조선 정부의 정책을 이렇게 가정해 본다. 청나라의 붕괴 등 국제질서의 변환기에 동만주, 북만주의 일부, 우수리강, 아무르강 유역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점검한다. 자연자원과 종족들을 조사하고, 호란 직후에 개시된 회령개시 등의 북관무역을 확장하고 주도한다. 신유가 표현한 대로 강력한 러시아(신유, 《북정록》)와 외교관계를 맺을 기회도 포착한다. 만약에 이러한 후속 작업을 충실히 실천했다면 나선정벌은 ’꿈‘을 넘어 북벌론을 ’현실‘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실용적 사고를 하는 정약용마저 ‘나선 정벌’이라고 말할 정도로 과대평가됐지만, 조선의 변화는 고사하고, 붕괴를 막는 데도 교훈을 주지 못한 단발적인 전투로 끝나버렸다.

냉정하고 과학적이기 그지없는 역사의 세계에서도 때론 터무니없는 ‘꿈’이 현실로 드러난 예들이 적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과 헬레니즘 문화, 칭키즈한의 대몽골, 이민자들이 만든 미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등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세계는 중국의 분열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실패를 단정했다. 이러한 감성적인 시류에 부화뇌동한 한국의 ‘그들’은 부국강병에 태만했고, 지금은 굴복한 모습마저 보인다.

늦었지만, 지금 당장 강력한 진짜 ‘한민족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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