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나

입력 2021-01-20 17:47   수정 2021-01-21 00:09

까마득한 옛날로 생각되는 1978년 8월에 미국 뉴욕 근처의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난생처음인 외국 생활도, 빠듯한 장학금도 문제라 여러 가지로 두려웠지만 박정희 정권 말기의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한편으로는 얼른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땐 뉴욕에 가려면 1주일에 단 한 번 뜨는 대한항공으로 로스앤젤레스(LA)까지 가서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LA에 내렸을 때 수십 개 비행편이 세계로부터 도착함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처음 경험했다.

1982년 8월 박사 논문 준비차 영국 런던에 갔다. 유럽 대륙을 들러 도착했기에 수중에 영국 화폐가 없었다. 체어링크로스 역에 내리자마자 환전센터에 가 여권과 달러를 내밀었다. 쉰 살쯤 돼 보이던 둥둥한 아저씨는 내 여권을 신기한 듯 보더니 “메이드 인 코리아 숟가락과 포크는 봤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졸지에 ‘메이드 인 코리아 사람’이 된 나는 그의 조크가 재밌어 한바탕 웃었다. 그만큼 한국은 먼 나라였다. 1987년 2월 귀국할 때쯤 삼성 TV는 미국 전자제품 매장 선반의 밑바닥에 있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도 연구를 위해 1년에 한 번쯤 영국과 미국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한국의 달라진 위상이 경탄스러웠고 한국을 세상에 알린 기업들이 고마웠다. 1990년대 어느 시점까지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믿었기 때문에 재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었지만 삼성에는 늘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다. 연구나 발표를 위해 외국에 나갔을 때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면서 앞으로 직면해야 할 여러 어려움을 새기며 머릿속이 복잡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눈에 들어오던 삼성 선전탑의 모습은 든든하고 위로가 됐다.

그래서 법리상으로는 어찌 됐든 이번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긴 송사에서 해방되기를 바랐다. 단순히 삼성이 우리 경제에서 담당하고 있는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삼성이 흔들리면 10년 뒤의 우리 먹거리가 걱정이라는 사실도 자명하고, 당장 삼성전자를 사댄 수많은 동학개미의 미래도 걱정이지만 그런 차원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외국 땅에서 느끼던 삼성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지난 세월 권위주의 정권의 개발경제정책 과정에서 재벌이 특혜를 받아 몸체를 키웠고 정경유착의 병폐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정경유착이 약해져왔음은 확실하고 정권의 비호를 받은 기업 가운데 많은 수가 사라져버렸지만 일부는 국민 경제에 이바지하는 번듯한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정경유착이라는 잘못된 관행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정리돼야 한다. 한데 이번 사건의 기소부터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무언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이번 삼성 사건은 정경유착의 기존 관행에서도 많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진다. 이 부회장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인상을 받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부터 소위 적폐 청산에 과도한 힘을 써왔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소위 과거사 청산과 적폐 청산이 우리 미래에 무슨 도움이 될까. 제주 4·3사태,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의 상처를 다시 쑤시는 것이 진정 국민 화합을 위한 길인가.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향함으로써 우리 정치가 더 나아졌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덮을 것은 덮고 잊을 것은 잊는 게 순리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영국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전임 체임벌린 정부의 잘못된 유화정책이 히틀러를 억제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민의 성난 목소리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우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싸움을 시작한다면 미래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 이 부회장 판결에는 확실한 법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이 시점에 그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순리가 아닌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법보다는 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법부도, 정치권도, 국민도 조금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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