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부산시가 한진해운 인수를 포기했던 까닭은?

입력 2021-02-17 10:18   수정 2021-02-17 11:46


한진해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가능성이 제기되던 2016년. 물밑에선 부산시가 한진해운을 인수하는 ‘빅딜(Big deal)’이 진행 중이었다. 부산시는 부산항만공사, 재무적투자자(FI)와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파산 위기의 한진해운을 인수할 계획이었다. 부산시는 글로벌 영업망을 갖춘 국적선사를 인수해 물류기지로써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였다. 4000억원이 없어서 파산위기에 내몰린 한진해운도 기사회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계약 마무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석태수 당시 한진해운 대표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진해운 인수건은 없던 일로 합시다”. 서병수 전 부산시장의 전화였다. 자금 준비와 인수 협의가 모두 마무리된 단계에서 부산시의 일방적 협상 중단 통보였다. 당시 협상을 주도했던 한진해운 전 임원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며 “한진해운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서 전 시장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뭘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윗선의 개입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서 전 시장에게 전화를 해 “한진해운을 지원하지 말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석 전 사장이 청와대에 들어가 안 전 수석과 면담을 했지만, 안 전 수석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한진 관계자들은 전했다. 당시 정부는 한진해운과 부산시가 서로 ‘윈윈’할 수 있었던 딜에 왜 무리하게 개입한 것일까?

이는 이미 알려진대로 최순실에게 미운털이 박힌 게 큰 원인이 됐다. 업계와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최순실은 고(故)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에게 3가지 요구를 했다고 한다. 당시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던 조 회장은 최순실로부터 △평창올림픽 개·폐막식 설계를 스위스 회사에 맡겨달라 △평창올림픽 경기장 시공사를 바꿔달라 등의 요구였다.

조 회장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이미 시공사 선정이 완료됐고, 설계를 원한 스위스 회사의 역량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정부 차원의 한진가(家) 괴롭히기가 시작됐다는 게 한진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 주요 타깃은 당시 위기에 빠져있던 한진해운이었다. 당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現 HMM) 등 컨테이너 선사들은 해운경기 침체와 고유가로 인한 경쟁력 약화. 과거 고비용 용선 계약에 발목이 잡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없으면, 위기를 넘길 수 없을 만큼 경영 상황이 악화돼 있었다. 이에 당시 정부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중 누구를 선택해 ‘선택과 집중’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대부분의 시장 전망은 한진해운을 살리고, 현대상선을 법정관리에 넣을 것으로 봤다. 선복량이나 영업망, 인적 네트워크, 글로벌 경쟁력 등을 감안할 때 한진해운이 현대상선보다 더 낫다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주채권은행이던 산업은행은 한진해운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한 경제부처 관료는 “조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진해운을 없애 버렸다”며 “이 탓에 손해를 본 국가 경쟁력을 따져보면 너무나 큰 정책적 실수”라고 말했다.

한진해운 파산은 댓가는 혹독했다. 곧바로 물류대란이 발생했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결정으로 공해상에 억류됐던 한진 그리스호는 화주 숫자만 2000명에 달했고,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피해자 숫자는 방대했다. 여기에 트럭, 철로 등 운송업자들의 한진해운 컨테이너 운반 거절 및 웃돈 요구 사태가 확산되면서 육상운송도 대혼란을 겪었다.

당시 물류대란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진정됐지만, 한진해운 파산으로 인한 유무형의 손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진해운의 파산을 막는데 필요했던 돈은 4000억원이지만, 현재 HMM을 한진해운 수준의 해운사로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돈은 가늠할 수 없다. 정부는 5조원을 투입해 신조 선박을 발주하고, 추가 증자 등을 통해서 HMM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린다는 복안이다. 산업은행이 보유한 지분을 민간에 넘겨 시장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하지만 3조원 영구채를 떠안고 있는 HMM을 사겠다고 선뜻 나서는 회사가 아직까지는 없다.

무엇보다 원양어선의 해외영업망이 붕괴된 것이 가장 뼈아프다. 이 탓에 아직까지도 HMM은 자체 선복량을 소화할만큼 운송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활약한 한진해운의 주요 인력들이 해외 선사로 유출된 것도 큰 상처다. 한진해운이 갖고 있던 해외 터미널 등 알짜 자산들을 모두 MSC 등 해외 글로벌 선사들에게 헐값에 넘긴 것도 해운 경쟁력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HMM이 갖고 있던 부산신항 4부두(PSA현대부산신항만) 지분은 사모펀드 운용사 IMM인베스트먼트에 800억원에 팔았다가 약 2000억원에 되사왔다. IMM인베스트먼트의 출자자로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이 참여했고, HMM이 지분을 되살 때 독소 조항이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일정 수익률에 미달될 경우 HMM이 싱가포르항만공사(PSA)에 이를 보존해줘야 한다는 조항 등이다.

한진해운 파산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HMM을 한진해운 버금가는 회사로 다시 키워내는 게 중요하다는 데 해운업계의 의견은 모아진다. HMM과 중소형선사들이 연합해 공동으로 해외 터미널을 인수하고, 물류기지를 구축하는 등의 협업도 필요하다. 그래야 출혈 경쟁을 막고, 상생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해운은 산업의 혈맥이고, 수출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올해처럼 운임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국적선사가 없다면, 국내 기업들이 받을 타격은 가늠하기 힘들다.

해운 전문가는 “해운은 시기와 타이밍을 잘 맞춰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회사가 이기는 구조”라며 “지난간 일은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감한 의사 결정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해운산업에서 정부의 정책 실수가 또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며 “산업은행, 해양진흥공사, 해수부 등으로 흩어진 콘트롤 타워를 명확하게 해 정책결정 속도를 높이는 게 선결 과제”라고 덧붙였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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