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정세균 총리는 아직도 부끄러운가

입력 2021-02-18 17:52   수정 2021-02-19 00:13

특허 영업비밀 등 지식재산권 제도가 시대에 맞게 진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갑론을박이 있다. 특허만 해도 독점적 권리 부여를 통한 유인과 기술확산을 통한 사회경제적 활용 극대화 사이에 생기는 긴장은 여전하다. 인력 이동의 자유와 지재권법, 지재권법과 경쟁법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지재권 제도가 존속하는 이유는 이점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그렇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사다리 걷어차기’ 같은 시비가 있지만 국가 간 자유무역 협정에는 지재권 조항이 꼭 들어간다. 미·중 충돌만 해도 결국 지재권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 대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판정이 나오기 얼마 전이었다. 방송기자클럽에 초청받은 정세균 국무총리가 두 기업 간 소송 질문이 나오자 “낯부끄럽다”고 했다. 구글 MS 애플 등이 지재권 소송을 벌인다고 미국 정부가 “우리 기업끼리 싸워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기업에 있었고 특허청을 외청으로 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낸, 그래서 기업과 시장, 경제를 잘 안다고 말하는 총리의 인식이 이런 정도다. 정 총리는 지금도 부끄럽게 느끼는지 궁금하다.

ITC 판정을 두고 미국 주지사, 글로벌 완성차 등 이해관계자가 저마다 요구를 내놓는 장면은 과거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어떤 위상을 갖게 됐는지 정부만 모른다.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지재권 소송으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인식부터 시대착오적이다. 중소벤처기업 간이든, 대·중소기업 간이든, 국내·외국기업 간이든 생존이 걸린 소송인 것은 매한가지다. 오랜 기간 적자에도 피나는 연구개발 투자로 이뤄낸 성과를 둘러싼 다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로선 지재권 소송의 절박성이나 의미가 더할지 모른다. 반도체 TV처럼 국내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며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만약 “한국 기업은 죄다 한통속”이라고 의심받기라도 하면 각국 경쟁당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 중국 기업만 좋은 일 시킨다는 어설픈 ‘국익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내기업 간 치열한 특허소송이야말로 중국 기업에 강한 경고장이 된다. 한·일 갈등에 따른 일본 기업의 역습에 맞설 무기도 지재권밖에 없다. 동맹국 미국의 기업도 지재권 앞에선 예외가 아니다.

ITC 판결의 승자와 패자, 이후 전망에 대해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길게 보면 한국 기업들이 ‘룰(rule)’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관점도 가능하다. 정부 개입 없이 룰이 정립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면, 한때 싸우던 기업도 언제 그랬냐는 듯 협력할 수 있다. LG·SK가 인공지능(AI) 같은 미래 분야에서 손을 잡지 말란 법도 없다. 일각에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베팅, ‘갈 데까지 간다’는 식의 후속 소송 가능성을 점치기도 하지만, 기업은 냉정하다. LG·SK가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법조계 일각에선 양사의 의사결정권자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우려도 하지만, 이 역시 국내기업에 대한 편견일지 모른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전문경영인의 역할도 컸다. 아무리 파리목숨이라지만 양사에는 당장의 자리 보전보다 기업을 생각하는 훌륭한 전문경영인이 많다.

시장은 소송의 결론만 보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판결, 그리고 그 후까지 기업의 태도를 주시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시대’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송 기업 모두 승자 또는 패자가 되거나,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가 되기도 한다. 좋은 선례가 남도록 정부는 지켜볼 수 없는가. 정 돕고 싶다면 아무도 모르게 하든지.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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