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에너지 정책은 이념이 아니다

입력 2021-02-22 17:56   수정 2021-02-23 00:53

2002년 겨울로 기억한다. 미국 텍사스 유학시절, 오스틴에 눈이 내렸다. 많은 눈도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는 마비 직전까지 갔다. 학교는 문을 닫았다. 길에는 차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혹 길 한쪽에 미끄러져 세워진 차들만 눈에 띄었다. 5년 만의 눈이라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텍사스는 한겨울에도 좀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런 곳이 지난주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다. 기록적 한파에 발전시설들이 얼어붙으면서 430만 가구에 전력공급이 끊겼다. 촛불을 켜고, 장작을 때고, 심지어 자동차 히터 열을 끌어들여 집안을 덥히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상 한파는 제트기류에 갇혀 있던 차갑고 건조한 극소용돌이가 미국 본토 남단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발생했다. 아무리 춥다 해도 ‘에너지 왕국’으로 불리는 텍사스의 전력시스템이 이렇게 허술할까 싶다. 민간에만 맡긴 체계가 문제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텍사스 전력망은 비영리 회사인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가 운영한다. 전기는 여러 민간 발전회사들로부터 구입한다. 경쟁체계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싼값에 전기를 쓴다. 대신 발전회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꼭 필요한 투자만 한다. 대체로 겨울이 포근한데 굳이 혹한에 견디는 가스관이나 풍력 터빈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부가 전력기본계획을 수립해 수급을 관리하고, 발전 설비 건설 등을 정하는 한국에선 텍사스 시스템과 그 허점으로 인한 난리가 낯설다.

그럼에도 텍사스 재난이 딴 동네 일 같지 않은 측면이 있다. 우선 빈번해지는 이상기후다. 이번 한파의 원인인 제트기류 약화는 극지방 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 관련해선 주요국 중심으로 공동 대응의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 유럽연합(EU) 일본은 2050년까지, 중국은 2060년 이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50년 탄소중립을 약속했다. 기업들은 이미 생존차원에서 탄소배출 저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 미국이나 유럽에 물건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기업경영 전략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됐다.

목표 선언 다음은 현실적 방법론이다. 한국은 에너지 정책에서 탈원전 이슈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립자가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청정에너지의 하나로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을 언급하자, 서울시장 선거전에서까지 이 주장의 ‘진의’를 놓고 논쟁이 불거졌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이 근간인 4차 산업혁명은 ‘전기’를 빼곤 생각할 수 없다. 화석연료를 대체하기 위한 전기차 보급도 전기 수요를 끌어올린다. 빌 게이츠는 탄소중립을 위해서만 전 세계 전기사용량이 현재보다 2.5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면 40%가 넘는 석탄화력 발전 비중을 우선적으로 낮춰야 한다. 그런데 탈원전까지 하면서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텍사스 악몽이 풍력발전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풍력 태양광 같은 신재생에너지가 날씨에 민감하고 공급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보완한다는데 비용이 문제다. 탄소중립 한다고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정도로 에너지 값이 비싸져선 안 된다.

‘2050 탄소중립’과 탈원전 정책, 병행이 가능할까. 정부가 진짜 그렇게 믿는다면, 상식선에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작년 12월 발표한 ‘탄소중립 실현전략’ 후속으로 올해 6월까지 보다 정교한 ‘시나리오’를 수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기엔 납득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길 바란다.

ps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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