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준의 통찰과 전망] 글로벌화한 식재료와 촌락적 사고의 간극

입력 2021-03-22 17:52   수정 2021-03-23 00:37

“당신이 먹은 음식을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인 앙텔름 브리야사바랭(1755~1826)이 저술한 《미식예찬》에 나오는 문구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웰빙 트렌드가 부상하면서 유명해졌다.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어야 건강한 신체를 유지한다’로 흔히 해석하지만 당초 저자는 ‘누군가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소속된 신분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왕과 귀족, 평민 등으로 구분됐던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신분에 따라 음식이 달랐다. 소고기는 귀족과 부호들이나 즐겼고 후식인 치즈, 과일, 음료 등도 구분됐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장벽과 경제적 격차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2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신분에 연동됐던 음식이 오늘날에는 개인적 선호로 변화됐다. 이처럼 일상의 식탁에도 당대의 사회·경제상이 투영돼 있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를 ‘수레(車)’ 항목으로 시작한다. “영동에서 꿀이 생산되나 소금은 없고, 관서에는 철은 생산되나 밀감이나 유자는 없다. 영남의 절에서는 명품 종이를 생산하고 보은에는 대추, 강화에는 감이 많다. 백성들이 이들을 서로 이용해서 살림을 풍족하게 하고 싶어도 운반할 방법이 없다.” 이후 20세기 초반 간선도로망인 신작로가 정비되고 비로소 중부 내륙의 특산물인 안동 간고등어가 등장했다. 전국적으로 즐기는 싱싱한 활어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건설된 고속도로의 파생물이다. 일상의 음식인 간고등어와 활어회에도 지난 100여 년간의 근대화 과정이 압축돼 있다.

경제학 관점에서 교역은 지역 간의 가격 차이가 이동 비용과 일치하는 선까지 일어난다. 도로망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물류비용이 낮아지면 가격 차이가 좁혀지면서 교역이 확대된다. 그러나 공산품과 달리 식재료는 신선도 유지가 필요하고 부피도 커서 교역이 어려웠다. 국제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생겨나는 장벽도 존재했다. 냉전시대인 1970년대에는 소련산 보드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았고 국산 라면이 소련으로 수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냉장·냉동 컨테이너가 도입되고 정보기술을 활용한 고도화된 글로벌 물류체계가 출현하면서 채소, 생선 등의 농수산물도 국제 교역 범위로 편입됐다. 또 냉전 종식으로 세계가 글로벌 경제로 통합되면서 자유 교역의 시대가 열렸다.

현재는 동네 슈퍼의 수산물 코너에도 동남아 태국의 새우, 아프리카 세네갈의 갈치, 북유럽 노르웨이의 고등어가 진열돼 있다. 미국산 옥수수, 호주산 소고기, 스페인산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고 후식으로 칠레산 포도, 브라질산 오렌지, 이탈리아산 와인을 즐긴다. 지난 설 명절에 차례상에 오른 음식들의 원산지를 보면 그야말로 만국박람회가 열린 느낌이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식탁에도 지난 100여 년 동안 진행된 신분제 소멸, 근대화와 산업화, 냉전 종식, 글로벌 물류망의 발달이 응축돼 있다. 이런 과정은 ‘자유, 개방, 연결’의 가치에 기반했다. 개인은 신분에서 자유로워져서 능력으로 인정받고, 공동체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광대한 세계와 연결하면서 가능성을 확장했다. 지금도 상당수 제3세계 저개발국가는 이런 흐름에 뒤떨어져 있지만 우리나라는 평범한 생활인의 일상적 식탁에도 지구촌의 페스티벌이 열리는 수준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가 섭취하는 식재료 범위는 글로벌로 확장됐지만 정신적 자양분은 협소한 촌락으로 퇴화되는 느낌이다. 최근 사회·경제적 제도가 대한민국의 성공적 지향점이었던 ‘자유, 개방, 연결’의 가치와 괴리돼 조선 후기 성리학의 망국적인 ‘타율, 폐쇄, 단절’의 함정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든다. 국내외적으로 정치·경제 질서가 요동치는 소위 격변의 시기일수록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겸손한 자세로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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