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와 사회, 문명을 건설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산업력’ ‘기술력’ ‘무장력’ 등이 떠오르지만 근본은 ‘사람의 힘(人力)’이고, ‘사람산업(정신사업 인재양성사업)’이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문화국가’ ‘경제국가’라고 자만한 아테네에 승리한 근본적 이유는 단결심, 애국심, 책임감을 지닌 시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경주 지역에서만 6개 발견된 금관·허리띠, 금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황금유물과 구슬·유리제품들은 부가가치가 절대적인 금광산업과 화공기술이 발달했고, 상상을 뛰어넘는 공예 기술력 또한 갖췄음을 증명한다. 알타이 산록의 이식고분군에서 발굴된 황금인간, 사르마트 금관, 틸리아테페 금관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기술과 미(美)의식은 신라가 매우 수준 높은 문화사회로 진입했으며, 국제사회에 적극적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 시대에 등장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을까? 서기 400년에는 광개토태왕의 5만 군대가 신라의 파병 요청을 명분으로 신라 영토에 진입했다. 신라는 계속해서 영토를 빼앗겼고, 자주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라인은 이 같은 현실을 역이용했다. 고구려인이 가져온 선진 문물과 기술력, 군수품과 군대의 조직력 등을 수용했다. 실성왕처럼 인질로 파견된 왕족과 귀족은 국가 조직의 실태와 운영 능력을 습득했고,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세계의 문화 등을 배우면서 국제질서를 파악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게 됐다. 408년에는 고구려 주도이긴 했지만 대마도(쓰시마섬)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였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선덕여왕 땐 황룡사에 약 80m에 달하는 9층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적, 9층은 예맥을 억누른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약소국인 신라 지도층이 자신과 백성들에게는 물론이고 주변국들에 강국의 건설과 통일의 실현이라는 일종의 국시를 자신감 있게 선언한 징표는 아닐까? 이렇게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신사회를 꿈꾼 신라는 ‘화랑’이라는 특별하고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신라는 4세기 말까지도 세계 질서에 어두웠으나 5세기에 이르러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그 증거가 경주 대릉원에 남은 큰 규모의 고분들과 그 안에서 발견된 황금 유물들이다. 신라는 고구려인이 가져온 선진 문물과 기술력, 군수품과 군대 조직력 등을 수용했다. 유라시아의 문화 등을 배우면서 국제질서를 파악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됐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