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사라지는 구멍가게…'마음 구멍'도 커지네

입력 2021-04-15 18:02   수정 2021-04-16 02:36


전남 장성군 남면 연산마을. 각종 과자와 음료부터 세제, 신발과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필품을 가득 실은 낡은 푸른색 1.5t 트럭이 구멍가게 ‘연산상회’ 앞에 서자 주인 할머니가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다. 할머니의 손에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구입을 부탁받은 생필품 목록이 적힌 종이가 들려 있다. 매주 한 번 이렇게 ‘만물 트럭’에서 물건을 사다 동네 주민에게 전달하는 것은 할머니의 중요한 일이다. 꽤나 시간을 들이는 일이지만 따로 수수료는 없다.

“안 받아. 받아서 뭣혀. 그것도 좋은 일이다 하고 살제. 내가 살았응게 그것도 해주는 것이제. 죽으믄 못 헌다, 그것도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는디. 긍게 누가 심부름 시키믄 그도 헐만 헝게 시킨다, 좋드라고 나는. 그렁게 해줘.”

《구멍가게 이야기》는 구멍가게들이 사라지는 데 아쉬움을 품은 두 명의 저자가 작성한 농촌 르포르타주다. 2년여 동안 매주 전남 농촌 지역을 돌며 상회, 점빵, 구판장, 담배집 등의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100여 곳의 구멍가게를 방문했다. 저자들은 이 중 50여 곳의 구멍가게 주인과 단골손님들을 인터뷰해 책에 담았다.

구멍가게를 매개로 농촌의 사회·문화적 변화 과정을 담아낸 사회문화사 성격의 책으로, 저자들은 달라지는 구멍가게 모습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그려낸다. 예를 들어 구판장이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개발계획, 농협 조직의 출범과 관련이 있다.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1960~1970년대 농촌진흥 사업 영향으로 당시 농촌 지역에서는 마을회관, 공동작업장 등의 설립 움직임이 활발했다. 마을 공동 매장인 구판장도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들어서기 시작했다.

구판장은 원래 마을 공동체가 공동 운영하는 일종의 협동조합 매장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다. 구판장에서 벌어들인 판매 수익의 일부는 마을 공동체에 내놓거나 구판장에서 사용한 금액에 따라 주민 개개인에게 배당을 줬다. 저자들은 구판장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가격 면에서 전통시장에 비해 저렴하지 않았다”며 “제아무리 마을 공동 가게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장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설명한다.

농사가 한창인 계절에 농촌 지역을 답사한 저자들은 구멍가게야말로 서로 농사법을 배우며 농산물 시세, 마을 현안 등에 대한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커뮤니티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데 와야 그래도 얘깃거리가 생기지. 말하자믄 여기가 영농 교육장이여. 여기서 정보 교환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옛날 가게가 아주 중요해요.” “뭐든지 소식 정보를 들으려면 여기를 와. 여기를 한 1주일간 빼먹잖아? 그러면 마을에서 초상 나도 몰라. 오늘 뭐 결혼식 있어도 모르고.” 흙 묻은 장화 차림으로 구멍가게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 한 잔을 하던 농민들이 저자들에게 던진 몇 마디 말에서 구멍가게가 갖는 의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시대마다 구멍가게 매대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던 인기 상품을 통해 사회의 변화와 시대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971년 출시된 새우깡은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같은 회사에서 만든 라면을 사야만 새우깡을 살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초코파이 좀도둑이 극성을 부렸다는 일화도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애환을 다룬다. 대부분 농사지을 변변한 땅이 없어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시작했던 가게이기에 구멍가게 주인들의 사연은 삶의 거친 질곡을 숨김 없이 보여준다. “살아온 일을 생각하믄 참말로 아실아실해”라는 한 구멍가게 주인의 말처럼.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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