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부끄러움을 모르면 괴물이 된다

입력 2021-04-22 17:28   수정 2021-04-23 02:39

한국어에는 부끄러운 감정을 가리키는 표현이 많다. 부끄러움, 수치, 창피, 민망, 면구, 쪽, 망신 등 명사만 열 가지를 넘는다. 뒤통수를 긁적이고, 얼굴을 가리고, 손이 떨리고, 고개가 숙여지는 등 동사와 형용사도 다양하다. 가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민족’이라고 부를 만하다. 현실은 다르다. 스스로 반성하고 부족한 점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드물다. 진영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반대의 ‘내로남불’ 행태가 넘쳐난다.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분석해 한국 사회의 이런 현실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저자인 이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그리스 신화부터 서구의 자연과학과 동양철학, 뇌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이 감정을 다방면에서 해부한다.

저자는 부끄러운 감정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부정적인 측면은 ‘수치’라는 단어로, 긍정적인 측면은 ‘부끄러움’으로 재정의한다. 수치는 인간을 파괴하는 어두운 감정이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수치심이 대표적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맛본 뒤 알몸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이 옷을 비롯해 여러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후 수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 온갖 부정적 감정을 뜻하게 됐다.”

하지만 뇌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부끄러움은 인간이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고등한 동물이라는 증거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기대에 못 미칠 때 드는 감정이다. 타인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뇌를 가지고 있어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동양철학도 부끄러움을 양심과 연관짓는다. 예컨대 ‘염치가 없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는 고사성어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자(管子)가 쓴 《관자》에서 비롯된 말인데, ‘부끄러움을 잘 살핀다’ ‘무엇이 부끄러운 줄 알고 행동을 절제한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부끄러움이 자기반성 및 자기 교정과 연관됐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런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에 부족한 ‘부끄러움’을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에 둔감하고, 무시를 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 안타까운 부고 앞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이익집단의 정치적 구호를 외치고, 폭력의 희생자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시 가해를 가하는 건 이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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