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부회장, '관종' 비아냥에도 SNS 멈추지 못하는 이유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입력 2021-05-23 13:34   수정 2021-05-23 13:46


신세계그룹엔 대관 조직이 없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건 절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법을 바꾸기 위해 국회에 드나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함께 이마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구학서 부회장 시절부터의 오랜 전통이다.

정해진 조건에 순응하는 신세계그룹의 조직 문화를 보여주는 일화 한 가지가 있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인데, 신세계는 한때 신용카드 사업 진출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소비자들이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하자, 아예 신세계가 카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였다. 요즘 네이버와 쿠팡이 e커머스를 시작하면서 네이버페이, 쿠팡페이 같은 결제금융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구학서 사장은 ‘신세계 카드’ 출시를 반려시켰다. 삼성카드 등 기존 회사들과 제휴하면 그만이지, 그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용카드업에 채권 추심 업무가 반드시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신세계의 경영진이 신사업 진출에 난색을 표했던 요인이었다고 한다. 소비자에게 편의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정도 경영'의 빛과 그늘
이 같은 신세계의 조직 문화는 몇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삼성그룹에서 분가(分家)한 기업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다른 삼성 계열 그룹들과 혹여라도 충돌할 수 있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는 대원칙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주요 경영상 결정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영역에 진출할 일이 없으니, 국회나 공무원을 상대할 대관 조직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유통업의 특성과도 무관치 않다. 신세계그룹은 1993년 이마트 창동점을 시작으로 국내에 첫 대형 할인점 시대를 열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유통 채널이었다. 소비자들은 쾌적하고 편리한 쇼핑 공간을 체험하며, 품질 좋고 값싼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다는데 열광했다. 이마트가 촉발시킨 할인점 ‘붐’은 전통시장을 비롯해 동네 수퍼 등 소상인들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복잡한 유통 단계에서 이득을 취했던 수많은 도매상들 역시 이마트의 ‘혁신’에 반발했다. 국회가 대형유통업법을 만들고, 상생 이슈가 불거지는 등 거센 외풍이 불자 신세계는 더욱 옷깃을 여미었다.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아도 시쳇말로 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93년 이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마트는 단 한 차례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동해 외딴 도시에 매장을 내도 1년이면 투자비를 뽑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덕분에 이마트 매출(연결 기준)은 지난해 22조330억원에 달했다.

신세계그룹의 ‘정도 경영’은 백화점 중심의 ‘중소기업’이었던 신세계가 재계 11위(지난해 자산 기준)에까지 오르는데 원동력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더 큰 도약을 가로막는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1년 6월 이마트가 발표했던 ‘레츠고 2020’이라는 그룹의 비전 전략만 봐도 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당시 최병렬 이마트 대표는 글로벌 종합 유통 기업으로의 도약을 외치며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3.7조원을 2020년에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이마트는 이마트몰을 해외 진출과 함께 양대 핵심 사업으로 선정하고 온라인몰에서 이마트 전체 매출의 15%(약 9조원)를 만들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본래 목표는 장미및 전망일 수 밖에 없긴 하지만, 10년 전 이마트의 전망은 실제와는 너무나 괴리가 크다. 2020년 매출은 목표치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온라인몰 매출 역시 SSG닷컴의 지난해 거래액이 3.9조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표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쿠팡, 네이버 등 디지털 유통 공룡들의 공세가 거세진 최근 3년 간의 실적은 사실상 퇴보에 가깝다. 매출은 17조(2018년), 19조(2019년), 22조(2020년)원으로 조금씩 성장을 했지만, 영업이익은 2018년 4628억원에서 지난해 2371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28년 전의 이마트는 지금의 쿠팡
1993년 설립된 이마트는 당시의 혁신 유통 기업이었다. 요즘의 쿠팡과 같다. 쿠팡이 한국의 토양에 맞는 ‘개량된 아마존’을 선보였듯이, 이마트도 월마트라는 미국의 입증된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에 들여와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지금의 이마트는 ‘룬샷(loon shot, 미친 아이디어)’이 사라진 안정형 기업으로 고착됐다. 지난해 이마트의 정년퇴직자는 300~4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국내 대기업 중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 해에 정년을 마치는 곳은 아마 신세계가 유일할 것이다. 그 만큼 직업의 안정성이 높다는 방증이지만, 거꾸로 경영진 입장에선 고용의 비탄력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마트에 노조 단체가 3곳이나 있다는 것만 봐도 이마트 경영진이 처한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프로야구단을 인수하고, 네이버라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으며, ‘관종’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면서까지 SNS 마케팅에 적극적인 것을 이해하려면 그를 둘러싼 엄혹한 경영환경을 빼놓고선 설명하기 어렵다. 정 부회장은 ‘노브랜드’라는 이마트 PB를 직접 만들어 성공 궤도에 올려놨다. 코스트코를 벤치마킹한 트레이더스도 올 1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15%의 매출 성장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그럼에도 이마트는 쿠팡, 네이버의 공세에 가장 취약한 유통 채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이버와 연합해 이베이코리아를 인수하려는 것도 정 부회장으로선 일생일대의 ‘풀 베팅’이다.

정 부회장은 아마 이마트와 신세계그룹이 쿠팡과 네이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는 그날, SNS를 중단할 지도 모른다. 사석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마트가 소비자의 선택지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념이 그를 SNS의 세계에 어쩔 수 없이 발붙이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정 부회장의 ‘고군분투’가 외로워 보이는 이유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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