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백신 기술 주던 일본, 코로나 백신 왜 못만드나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입력 2021-05-22 12:00   수정 2021-05-22 19:05


일본은 1980년대까지 수두와 일본뇌염, 백일해의 백신기술을 미국에 공여하던 백신 강국이었다. 1975~1989년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160개의 신약을 개발한 제약 강국이기도 했다.

그랬던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도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못 만들고 있다. 일본 미디어들도 자국을 '백신 후진국'이라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30여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신 강국' 스스로 반납한 나라
전문가들은 일본을 백신 선진국의 자리를 스스로 반납한 나라로 평가한다. 두 차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1992년 12월18일 도쿄고등법원의 판결이다. 1952~1974년 인플루엔자, 홍역, 볼거리 등의 백신을 접종한 자녀가 부작용으로 장애를 입거나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부모와 가족 160명이 제기한 집단소송에서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을 명령했다.

훗날 전문가들의 검증결과에 따르면 이 판결은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인정되지 않은 현상까지도 부작용으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피해자 구제의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여론에 밀려 상고를 포기했다.

1994년에는 법을 개정해 예방접종을 의무사항에서 벌칙조항이 없는 '노력의무'로 완화했다. 유아의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고, 학교 단체 예방접종도 사라졌다. 수요가 급감하자 제약사들도 일제히 백신사업에서 철수했다.

두번째 계기는 1996년의 혈우병에이즈사건이다. 비가열처리 방식의 혈액응고제에 에이즈균이 섞여 들어가면서 일본 혈우병 환자의 40%인 1800명이 에이즈에 걸리고 4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96년 재판에서 해당 의약품을 판매한 제약회사는 물론 후생노동성 담당 과장이 업무상과실치사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총리 말도 안먹히는 부처'로 유명한 후생노동성의 복지부동을 고착화하는 구실이 됐다. 판결 이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승인이 끝난 백신이 일본에서 승인을 받는데는 수년에서 10년 이상 걸리는 '백신 갭(공백)'이 일상화했다.

2017년에는 바이오 기술을 응용해 인플루엔자 백신을 개발한 신흥 제약벤처기업 UMN파머가 10년 가까이 후생노동성의 인가를 받지 못해 파산하는 일이 있었다.

감염이 세계적으로 확산하지 않으면 수요가 발생하지 않는 백신은 민간 기업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기 부담스러운 사업이다. UMN파머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 정부가 기업의 백신 개발을 지원하기는 커녕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백신기술이 30년 가까이 잠자고 있는 사이 세계 의약품 시장은 연간 130조엔(약 1347조원)이 넘는 거대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백신시장은 매년 7%씩 커지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과 에볼라바이러스 등 새로운 전염병 주기적으로 창궐하고 그 때마다 새로운 백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거대 제약회사의 몸집이 날로 커지면서 일본 최대 제약사인 다케다제약도 세계 10대 제약사(2020년 매출 기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백신개발 지원하는 美·발목잡는 日
일본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2001년 탄저균 테러사건을 계기로 백신 개발 체제를 한층 진화시켰다. 보건복지부(HHS)를 중심으로 관계 부처가 제약회사와 연구기관과 협력해 개발자금 지원부터 임상실험, 긴급사용허가(EUA) 등 백신 개발 전 과정을 종합 지원한다.

특히 EUA는 화이자와 모더나 같은 미국 제약사가 1년도 안돼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던 제도적 장치로 평가받는다. EUA는 코로나19와 같은 긴급상황에서 최종 임상실험인 3상실험을 사후 데이터 검증으로 대체하는 제도다.

일본도 시오노기제약 등 4곳의 일본 제약사가 1~2차 임상실험을 마쳤지만 3상실험 결과에 따른 승인제도를 고집한 규제에 또다시 발목을 잡혔다. 뒤늦게 일본 정부가 미국의 EUA를 본딴 특례를 도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일본산 코로나 백신의 등장은 2022년 이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나카야마 데쓰오 기타사토대학 특임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일본의 백신 공백은 정책 공백이 초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5월 중순까지 일본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3%대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일본 정부는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21일 모더나와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국내 사용을 승인했다.

이미 승인이 끝난 화이자 백신 9700만명 분에 아스트라제네카(6000만명분)와 모더나(2500만명분) 백신 8500만명분이 추가돼 전 국민이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확보했다고 일본 정부는 설명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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