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당(高唐)전쟁에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유민들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대거 들어온 군인·정치인·지식인·기술자 등의 인적자원은 신흥 일본을 경제적·문화적으로 발전시켜 역사상 최대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제의 역사와 뒤섞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이 출판됐고, 유민들의 족보도 만들어졌다. 또 일본 천황가와 부계·모계로 얽혀 혈연관계는 더욱 강해졌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이 거주하는 지역은 ‘구다라군(百濟郡)’으로 명명됐다. 2002년 월드컵 때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칸무(桓武)천황의 어머니는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민들의 행적과 백제계 출신이 주도한 도다이지(東大寺)나 호류지(法隆寺) 같은 대사찰, 대규모의 방어체제, ‘백제왕 신사’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우리가 상실했던 백제역사를 복원해 준다(윤명철,《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
유대인은 2000여 년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도 디아스포라와 정체성을 유지했고, 끝내는 감동적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이 처절한 디아스포라의 존재조차 모르는 우리가 ‘민족통일’과 ‘한민족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을까?
백제 복국군은 왜(倭)의 병선을 타고 거친 북서풍을 맞으며 대한해협을 건넜다. 뒤따라 백성들과 지방세력도 전라도 해안 등에서 출항해 ‘보트피플’로 떠돌다가 일본열도의 곳곳에 닿았다. 대거 들어온 군인·정치인·지식인·기술자 등의 인적자원은 신흥 일본을 경제적·문화적으로 발전시켜 역사상 최대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주, 몽골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와 파미르 고원, 티베트,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지역 그리고 일본의 에도, 규슈, 오사카 등에도 고구려·백제의 최후와 유민들의 깊은 한이 배어 있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