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용서하지 않을 권리

입력 2021-10-14 17:29   수정 2021-10-15 00:09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의 저작권은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 있다. 물론 전 국회의장 박희태가 만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마찬가지로 저작권료는 없다. 1998년 8월 17일, 클린턴은 저 세기말 최고의 얍삽한 용어를 창작하면서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에 대해 사과하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렇게라도 특별검사의 칼날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자기들은 온갖 방탕을 다 저지르면서 대통령에게만 사생활의 모범을 요구하는 미국인들을 재밌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으되, 클린턴이 하원의 탄핵 소추를 받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의 닉슨처럼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넌 거짓말쟁이야”는 파국이다. 하물며 정치인과 관료,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은 대통령이 되고 싶은 여자였기에 남편을 대중 앞에서는 감싸고 백악관 안에서만 폭행했다. 사랑이 권력욕보다 강한 게 아니라, 권력욕이 미움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 덕에 빌 클린턴은 탄핵소추안이 상원에서 부결됐지만, 자신의 ‘지퍼게이트’를 호도하고 위증 교사한 죄로 벌금과 변호사 자격 정지에 처해졌다. 인생이 그러하듯 로맨스도 불륜도 각자의 자유지만, 그 빤한 거짓말을 국민 앞에서 무슨 독립운동하듯 늘어놓는 자는 대통령이 되기에 부적절하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35달러, 문맹률은 78%였다. 85%가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으로, 소작료는 60%에 달했다. 후진 농업국가로서 농지란 쓸 만한 토지 전체를 의미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12월 4일 ‘토지개혁 문제’를 주제로 연설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 정체는 반상이나 귀천 등분이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 자유로 천연한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는 것이다.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다.”

1949년 4월 27일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50년 4월 15일(우연이겠지만 마치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김일성 생일에) 아직 시행령이 만들어지기도 전인데 대통령 특별령으로 농민들에게 농지가 전격 분배됐다. 6·25 두 달 전이었다.

1년 평균 수확량의 150%를 5년 분할 상환하는 조건, 이는 형식상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을 뿐 사실상 농민들을 위한 지주수탈에 가까운 ‘혁명’이었다. 한반도 5000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이 근대국가의 자유국민으로서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된 것이다. 722년 신라의 정전제가 있었고 1391년 조선의 과전법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평민이 아니라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수준이었다.

1960년까지 80%가 자작농이 됐고 이로 인해 양반 상놈의 카스트제도가 분쇄됐다. 이 일에는 우익 좌익이 따로 없었다. 대통령의 초인적인 의지와 초대 농림부 장관인 죽산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 인사와 진보 관료들, 인촌 김성수와 한민당 지주 보수 정치인들, 보수정당 안의 소장파 정치인들 등이 한뜻으로, 물론 다소간 역경은 있었으나,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이 ‘위대한 토지개혁’에 동참했다.

한국은 전 경작지의 95%가 자작지(自作地)다. 일본의 90%보다도 높다. 저 나라가 저 지경인 것은 토지개혁이 안 된 탓이라는 곳은 필리핀, 인도, 브라질 등 부지기수다. 멕시코는 좌익 혁명이 되풀이됐는데도 실패했다. 박헌영의 장담과 달리 6·25전쟁 때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민중이 자신의 토지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가톨릭계 지주들 때문에 공산화가 됐다. 북한은 1946년 3월, 단 25일 만에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인민 전체를 소작농화했고 1958년 집단농장으로 아예 고착시켰다.

지금 우리의 진보와 보수 선배들이 고뇌와 지혜와 희생으로 힘을 합쳐 ‘피 안 흘리고’ 이룩한 자랑스러운 ‘토지혁명의 도덕’을 감히 혁명가의 탈을 쓴 채 약탈하고 유린하는 자들이 있다. 자유국가와 민주국민의 근본인 땅에 대한 범죄는 이념의 섹트를 가리지 말고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 국민은 누군가의 ‘정치적 사병(私兵)’이 아니다. 저 ‘악질반동’을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포기하면 우리는 노예가 된다. 클린턴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My Life)》의 헌사는 이렇게 끝난다. “사람들이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경멸받는 사람들을 존경하라고 가르쳐주신 외할아버지께 이 책을 바친다.” 정의로운 척하며 세상을 지배하려는 요물들을 경멸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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