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산둥 지역은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은 물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도 거주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데 필요한 우호집단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이정기는 어떤 판단을 했는지, 779년에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州)로 옮겼다. 이 곳은 대운하의 물류망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곳이면서, 산둥 지역이면서도 수도인 장안과는 매우 가까웠다.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경험하면서 절도사들의 위협을 실감한 조정은 이정기를 위협세력으로 간주한 후에 대병력을 집결시켰고, 이정기 역시 공격을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강회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정기는 10만의 병력으로 장안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그 해 여름, 고구려 부활의 과도한 집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악성 종양으로 서거하였다(지배선, 중국속 고구려왕국 제》). 다행히 아들인 이납(李納)은 명민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위기를 수습한 후에 절도사의 직위를 이었다. 이어 ‘제(齊)’ 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이 산둥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의 아들들인 이사고(李師古)와 이사도(李師道)를 거치면서 모두 3대가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
한 개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고, 그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적인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다. 그의 부모가 품은 ‘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구려 후예라는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한민족의 역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망각했을 뿐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정기는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산둥의 등주로 이주한 뒤 절도사 지위에 올랐다. 775년에 이르면 15개 주의 84만 호(약 400만 명)를 다스리는 번진으로서 사실상 국가 위상을 갖췄고, 요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절도사들의 위협을 실감한 당나라 조정의 공격에 맞서 승리한 이정기는 장안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 악성 종양으로 서거했다. 아들인 이납(李納)은 ‘제(齊)’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제는 이후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