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식당에서 이탈리아 청년으로부터 난데없는 질문을 받았다. ‘방탄소년단까지는 아는데 블랙핑크는 누구더라’ 하는 표정을 짓는 한국 아저씨에게 이 청년은 오슬로에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사연과 함께 자기가 얼마나 ‘블핑 광팬’인지 한참 설명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왕궁 앞 광장에선 K팝을 틀어놓고 단체로 춤 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2019년 방문한 북유럽의 K팝 인기는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귀국 후 블핑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유튜브 구독자 5000만 명이 넘는 글로벌 1위 여성 아이돌그룹이었다. 수년 전 멕시코에서 우연히 만난 모녀가 한국의 모 연예인 팬이라며 말을 건네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징어 게임을 계기로 한국의 문화 콘텐츠 경쟁력을 분석하는 외신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정부의 문화지원정책을 핵심 원동력으로 꼽는 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분석이다. 김대중 정부의 문화지원정책이 한류 콘텐츠의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당시 문화정책의 핵심은 ‘간섭하지 않는’ 창작의 자유였다. 소재에 제약을 받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부조리 현상뿐 아니라 권력의 역린까지 건드리는 작품들이 쏟아졌다.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도 국수주의 관점의 역사물, 신파물로 소재를 제한하는 중국이 소프트파워를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다.
소프트파워 개념을 처음 내놓은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이달 초 워싱턴 전략국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중국은 매년 100억달러를 소프트파워 구축에 쏟아붓고 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프트파워는 강압·위협이나 거래가 아니라 매력으로 형성된 힘”이라며 “K콘텐츠를 갖춘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을 계기로 해외에선 한국의 콘텐츠파워를 조망하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선 대선 후보들을 희화화하는 용도에 그치고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콘텐츠정책 2.0’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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