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거인국에서 소인국으로

입력 2021-12-01 17:18   수정 2021-12-02 11:29

‘자기계발서의 오류’라고 해야 할까. 성공한 사람은 다들 똑똑하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똑똑하고 부지런하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에는 다른 무수한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은 엄연히 다르다.

1980~199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제학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게 있다. 토론이든 논문심사에서든 미국 교수들은 집요하게 ‘한강의 기적’ 성공 요인을 묻고 또 묻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겐 식민지와 전쟁 폐허 속에서 산업화·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불가사의로 비쳤기 때문이다.

흔히 인재 교육, 자본 유치, 중화학공업 육성 등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유엔 세계은행 등이 한국 모델을 다른 개발도상국에 숱하게 대입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만의 그 ‘뭔가 다른 것’은 뭘까. 한마디로 기업가정신이 아닐까. 기업을 운영한다고 기업가정신을 가진 게 아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하고, 결단하고, 혁신할 때라야 누구든 비로소 기업가정신을 말할 수 있다.

우선 사회주의가 세계를 휩쓸던 해방 직후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드높이 세운 것부터가 기적이다. 일찌감치 ‘근대’에 눈뜬 이승만이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미국과의 동맹으로 공산화를 막아냈다. 해방 전 소작농 75%에서 자작농 92%의 나라로 탈바꿈한 농지개혁은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 못했다면 3대 세습 독재 밑에서 끼니 걱정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한 지인이 들려준 일화도 힌트가 될 수 있다. 특출날 것 없던 1920년대생 부친을 모시고 중국에 갔더니 현지인들과 거리낌 없이 중국어로 소통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망국의 청년들은 좌절만 하지 않았다.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 러시아 연해주를 누볐다. 3~4개 국어를 하는 ‘세계인’이 적지 않았다. ‘공간의 경험치’와 ‘사고의 폭’이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LG 구인회(1907년생), 삼성 이병철(1910년생), 현대 정주영(1915년생) 등이 맨땅에서 산업을 일궈냈다. 이런 일화도 있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오일달러를 벌 방법을 찾고자 공무원들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보냈더니 “모래뿐이고, 물도 없고, 너무 덥다”고 ‘안 되는 이유’만 잔뜩 보고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닷새간 둘러보고 “모래 천지여서 자재 걱정 없고, 비가 안 와 1년 내내 공사할 수 있고,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될 이유’만 한가득 들고 왔다. 그렇게 따낸 게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다.

박정희(1917년생)가 한국인의 자조와 자립 의지를 이용해 찌든 가난과 만연한 패배의식을 ‘할 수 있다(can do)’ 정신으로 바꿔놓은 것은 놀라운 반전이다. 숱한 고초를 겪은 김대중(1924년생)이 오히려 용서와 화해에 앞장서 정적 사면과 일본 문화개방을 결단했다. 이들에게선 ‘정치적 기업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거인의 시대가 지난 뒤 우리 사회는 생각도, 의제도, 위기대처 능력도 점점 왜소해지는 듯하다. 한때 이건희 김우중 같은 아웃라이어가 있었다. 이건희의 삼성은 ‘넘사벽’이던 일본을 넘어섰다. 세계를 누볐던 김우중은 1998년 관료들이 무역흑자 20억달러를 예상할 때 ‘400억달러 흑자’를 주장했고, 그만큼 흑자가 났다. 이젠 그들도 떠나고 없다.

남은 우리에겐 나라를 더 높이 도약시킬 책무가 있건만, 성장이 멈춘 갈등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가득하다. 4류 정치는 미래가 어찌 되건 인기영합과 표 계산에만 몰두한다. 국정은 선무당의 무지와 원리주의 도그마가 판치고, 국민은 의자 빼앗기 게임에 내몰린다. 혁신가가 좌절하고 기득권 장벽 안에 숨은 이들이 더 득세하는 세상이다.

관직은 누가 줄타기 묘기를 잘하는가로 정해지고, 정치는 달걀 깨는 방식에 따라 ‘작은 모서리파’와 ‘큰 모서리파’로 갈라져 70년째 정쟁 중이라는 《걸리버 여행기》 속 소인국이 절로 연상된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한 치 꿀림 없이 세계와 맞짱 뜨는 젊은이들이다.

비좁은 나라에 갇혀 아웅다웅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의 시선은 세계로 향해 있다. ‘젊은 거인들’이 쏟아져 나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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