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이 흐른 요즘, 유통의 고수이던 백화점 MD와 김 회장 같은 ‘브랜드 헌터’ 간 위상은 180도 바뀌었다. 최근 선임된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와 손영식 신세계백화점 대표는 해외 브랜드 발굴에 도가 튼 전문가들이다. 현대백화점도 한섬 출신의 브랜드 헌터로 꼽히는 김형종 대표가 이끌고 있다. 브랜드를 고르는 선구안이 백화점의 경쟁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해외 패션의 ‘파워’는 백화점의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준호 대표는 당초 롯데쇼핑의 브랜드 발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신세계에서 영입된 인물이다. 롯데GFR에서 ‘카파’ 리뉴얼을 주도했다. 백화점업계 관계자는 “브랜드 전문가인 정 대표에게 롯데백화점을 맡긴 건 백화점에 관한 업(業)의 의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윈저’ 등 자체 패션 브랜드를 발굴하고, 해외 브랜드 수입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국내 브랜드들에 백화점의 금싸라기 공간을 빌려주면 판매액 대비 30%에 육박하는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상 백화점은 공간 임대업이나 다름없었다.
롯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신세계의 빠른 추격 덕분이다. 신세계는 정유경 총괄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해외 브랜드 발굴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강남점은 국내 유일의 매출 ‘2조 클럽’에 가입했다. 부산 센텀시티점은 2016년 지방 백화점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넘었다. 업계 관계자는 “대구점이 최단 기간 매출 ‘1조 클럽’에 가입한 것은 경쟁사에 있던 에르메스와 샤넬이 넘어온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신세계백화점과 삼성물산 패션부문 간 경쟁도 브랜드 발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각각 편집숍인 ‘분더샵’과 ‘비이커’를 통해 유명 패션 브랜드를 들여오고 있다. 두 편집숍은 한 해 세계 200여 개 브랜드를 직접 만나 100여 개의 신생 브랜드를 들여온다.
골프 패션도 브랜드 헌터들의 또 다른 전쟁터다. 신흥 패션기업으로 떠오른 코웰패션은 내년 초 골프웨어를 출시할 예정으로 미국의 한 패션 브랜드와 물밑 협상 중이다. MLB와 디스커버리 같은 해외 브랜드를 들여온 F&F도 지난 8월 골프 장비회사인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한 이후 새 브랜드를 찾고 있다. 전보라 삼성물산 텐꼬르소꼬모 팀장은 “과거에는 유명 패션 브랜드의 계약을 따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최근에는 비유명 브랜드를 들여와 수십 년 마케팅을 하며 히트 상품으로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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