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내의' 78國에 수출한 섬유산업 개척자

입력 2022-01-17 18:09   수정 2022-01-18 00:16

‘내의업계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한영대 BYC 회장이 17일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3년 전북 정읍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고인은 ‘속옷 외길’을 걸었다. 고인은 포목점 점원을 시작으로 자전거포, 미싱 조립 상점 등을 운영하며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들었다. 광복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 15일 BYC의 전신인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해 내의산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광복 이후 한국은 물자 부족 등으로 극심하게 피폐해져 있었다. 당시 국내 인구는 약 2000만 명이었으나 연간 내의 생산량은 약 52만 장에 불과해 국민 37.6명당 내의 1장꼴로 보급되는 현실이었다. 이에 한 회장은 내의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서둘러 메리야스 내의 생산에 들어갔다.

회사를 키워나가는 데 어려움도 닥쳤다.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전북 경제·상권의 중심지이자 도청 소재지였던 전주로 사업장을 이전한 뒤 국내 최초로 아염산소다를 활용한 표백기술을 개발했다. 새하얀 내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백양(白羊)’의 시작이었다. 한 회장은 대·중·소 세 가지로 구별했던 속옷 사이즈를 네 단계(85·90·95·100㎝)로 나누는 등 제품 규격화와 표준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다.

속옷 브랜드 BYC의 탄생은 한 회장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1985년 한 회장은 주식회사 백양(現 BYC)의 간부 회의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해외 유명 업체 브랜드를 다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을 유지할 것인지, 백양의 독자적인 브랜드를 앞세워 세계 시장에 진출할 것인지에 관한 토론이었다. 내부 반대 목소리도 높았지만, 한 회장은 고심 끝에 독자 브랜드 출시에 손을 들었다. 오늘날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는 브랜드 ‘BYC’가 탄생했다.

한 회장은 ‘품질 제일주의’를 고수했다. 과거 미쓰비시상사가 국내 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검토한 뒤 BYC 제품의 일본 수출을 제안했지만 한 회장이 ‘아직 수출할 만큼 우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 BYC는 1990년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상표를 넣은 로고와 ‘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성장해나갔다. 전성기에는 세계 78개국에 8000만달러어치의 메리야스를 수출했다. BYC가 꾸준한 인기를 얻자 한 회장은 1996년 사명을 백양에서 주식회사 비와이씨로 변경했다.

BYC는 이런 공로로 1998년 한국투신이 선정한 ‘생존능력이 뛰어난 상장회사 28개社’에서 10위 안에 선정되기도 했다. BYC는 한 회장의 셋째이자 차남인 한석범 BYC 회장이 맡고 있다. 손자인 오너 3세 한승우 상무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유족으로는 아들인 한남용 씨와 한석범 회장, 한기성 한흥물산 대표, 딸 한지형 백양 대표가 있다. 빈소는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 VIP 2호실, 발인은 19일이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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