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이상이 1936년 펴낸 단편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문구다. 일제강점기 신(新)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모던보이', '모던걸'은 커피를 마셨다.
한국에 커피가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커피 애호가였던 조선의 마지막 왕,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1852- 1919) 이전부터 커피는 조선 땅에 전파됐을 것이란 추정이 있을 뿐이다.
당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에게 커피는 사치품이었다. 그런데도 푸른 눈 선교사의 작은 방 안에서, 지식인들의 항일운동 비밀 아지트였던 다방 안에서, 커피는 그윽한 향을 풍기며 조금씩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1896년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한 고종. 커피를 마시며 쓰디쓴 마음을 움켜쥐었을 그는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126년 후 이 땅의 국민들이 365일 동안 한명 당 353잔의 커피를 마실 정도로 거대한 커피 왕국이 될 것을.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5년 펴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884년 1월 한강 변에서 커피를 접대받은 사연을 기록했다. 1860년 프랑스인 신부 베르뇌 주교가 홍콩에 보낸 서신에는 한국으로 커피를 주문한 흔적이 있고, 184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의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커피를 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국인 중 최초로 다방을 차려 커피를 팔았던 인물은 영화감독 이경손이다. 그는 1927년 안국동 네거리 근처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열었다. 카카듀는 프랑스혁명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모였던 술집의 이름을 따왔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다방은 그랬다. 시대적 각성을 은밀하게 논하던 지식인의 아지트로 여겨졌다. 물론 부잣집 도련님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랑방이란 엇갈린 평가도 있었지만 말이다.
시인 이상도 1933년 '제비다방'을 열었다. 종로 1가 33번지, 지금은 오피스 건물 '그랑서울'이 들어서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올림픽의 열기가 서울을 뜨겁게 달구던 1988년, 압구정동에 최초의 커피전문점인 쟈뎅이 문을 열었다. 원두를 그 자리에서 내린 에스프레소, 카페오레, 카푸치노가 등장했다.
1999년엔 스타벅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열었다. 손님이 직접 커피를 가져다 마시는 ‘테이크아웃’ 문화가 퍼졌다. 커피를 날라주고 따라주던 ‘레지’가 있는 다방은 그즈음부터 빠르게 사라졌다.
전국 골목골목 들어선 커피 전문점은 편의점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국세청 통계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 커피 전문점은 8만3363개, 편의점은 4만8458개다. 패스트푸드점 4만6371개, 노래방 2만7713개, 중식당 2만6632개와 비교해도 커피 전문점 수는 압도적이다.
스타벅스의 성장세만 봐도 커피가 얼마나 한국인의 일상을 빠르게 장악해왔는지 알 수 있다. 스타벅스는 한국 진출 22년 만에 매장 수를 1639개로 늘렸다. 매출은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2조원을 돌파했다.
퇴직자들은 치킨집 대신 커피 가맹점을 냈다. 이디야커피(2651개), 투썸플레이스(1097개), 메가MGC커피(798개), 커피에반하다(688개) 등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순식간에 늘어난 배경이다.
‘한국인의 생명수’라는 별명까지 생겨버린 커피는 수입에 의존한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커피 수입액은 전년보다 24.2% 증가한 9억1648만달러로 집계돼 사상 최대를 나타냈다.
지난해 평균환율이 1144.42원인 것을 감안하면 1조488억원 수준이다. 20년 전인 2001년 커피 수입액(7225만달러)과 비교하면 12.7배에 달한다.
커피 시장이 이미 포화에 이르렀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커피를 찾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커피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카페인이 부담스러운 사람, 유당불내증으로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제 커피를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카페인을 제거한 디카페인 커피, 우유 대신 오트(귀리)밀크를 넣은 카페라떼는 커피전문점의 인기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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