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연합(EU) 회원국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끊겠다고 통보했다. ‘러시아 통화(루블)로 가스 대금을 지급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러시아의 ‘가스 무기화’로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의 에너지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 가스 벨브 잠근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은 이날 폴란드와 불가리아 국영 가스회사에 27일부터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할 것이라고 전했다. 기존 계약대로라면 가즈프롬은 연말까지 이들 국가에 가스를 공급해야 한다. 러시아가 유럽 국가로 향하는 가스관을 잠그는 것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처음이다.러시아가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대한 가스 공급을 멈추기로 한 이유는 이들 국가가 루블화 결제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가즈프롬은 폴란드 국영 가스회사 PGNiG에 “26일까지 루블로 가스 대금을 납부하라”고 했다. 하지만 PGNiG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가스 공급을 끊겠다는 러시아의 일방통보를 받았다. PGNiG는 “계약 위반”이라며 “가즈프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불가리아 정부도 “계약 조항에 맞춰 적기에 대금을 지불했다”며 반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EU를 포함한 비우호국 명단을 공개하면서 이들 국가가 루블로 가스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루블의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친러시아 성향의 헝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EU 회원국은 유로와 달러로 결제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의 요구는 기존 계약에 어긋난다면서다.
러시아의 첫 타깃은 폴란드와 불가리아가 됐다. EU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폴란드의 러시아산 가스 수입량은 전체의 40%에 이른다. 불가리아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77%에 달한다. 폴란드는 이날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 방침을 전달받기에 앞서 가즈프롬을 비롯해 러시아 기업·신흥재벌 50곳에 대한 자산 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러시아가 이번 조치를 통해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는 서방 세계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에너지 위기 촉발되나
에너지 대란이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에 이날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폭등했다. 5월물 가격이 전날 대비 6.6% 오른 메가와트시(MWh)당 99유로를 기록했다. 장중 17%에 달하는 오름폭을 보이기도 했다. 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러시아가 가스 공갈로 유럽 동맹국의 단결력을 깨뜨리려 하고 있다”며 “EU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폴란드와 불가리아는 가스 공급난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다른 가스 공급처를 사전에 확보해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연쇄 에너지 대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특히 독일을 비롯해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의 제안대로 유로나 달러로 가스 대금을 지불하되 가즈프롬의 은행 자회사 가즈프롬방크가 루블로 환전해 가즈프롬 계좌에 입금하는 예외 방식을 적용할지 고려하고 있다.
카자 야피마바 옥스포드에너지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블룸버그통신에 “러시아의 새로운 지불 방법을 거부하는 구매자는 가스 공급이 끊길 위험이 매우 높다”고 했다. 유럽 경제 싱크탱크 브뤼겔의 시모네 탈리아피에트라 조사관도 “몇 주 안에 다른 국가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러시아의 이번 결정이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려는 유럽의 움직임을 오히려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 광물업체 관계자들을 인용해 “리튬 코발트 등 원자재 부족으로 유럽의 청정에너지 전환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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