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도 밭고랑도…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2-06-07 17:28   수정 2022-06-08 00:10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일의 결과를 미리 재단하지 말고, 인생을 폭넓게 보라는 뜻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다.

구름이나 비, 씨앗의 원리는 오묘하다. 같은 씨앗도 싹을 틔우는 속도가 다르다. 비가 많이 와서 햇볕을 못 받으면 웃자라고 약하다. 늦더라도 햇빛과 양분을 제대로 받으면 잘 자라고 튼실하다. 파종하기 전에도 마찬가지다. 밭고랑을 깊이 파되 밭이랑을 넓고 높게 돋워야 한다. 거기에서 될성부른 떡잎이 자란다.

사람은 어떤가. 두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타이거 우즈는 ‘조기 영재’ 스타일이다. 타고난 재능에다 생후 7개월 때 골프채를 쥐여준 아버지의 열정이 더해졌다. 반면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는 다양한 운동을 폭넓게 접하고 뒤늦게 테니스로 진로를 결정했다. 어릴 때 스키 레슬링 수영 야구 핸드볼 탁구 배드민턴 등을 두루 섭렵한 다음에야 테니스를 택했다. 성공한 선수들은 의외로 페더러 스타일이 더 많다.
'조기 전문화'와 '늦깎이 전문화'
베스트셀러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원제: Range)》을 쓴 미국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우즈를 ‘조기 전문화’의 표본, 페더러를 ‘늦깎이 전문화’의 전형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 늦깎이란 ‘경험의 폭을 넓힌 덕분에 그만큼 단단해졌다’는 뜻이다.

엡스타인은 조기 교육도 의미 있지만, 자기 적성과 관심을 폭넓게 탐사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공한 선수들은 1~15세 동안 자기 종목에 쏟은 시간이 의외로 적고 다른 운동을 다양하게 경험했다”며 그 시기를 ‘샘플링 기간’이라고 표현한다.

빈센트 반 고흐도 자기 화풍을 완성하기까지 숱한 직업을 전전했다. 미술상(商)과 보조교사, 서점 점원, 순회 전도사를 거쳐 32세가 돼서야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곧 그것마저 그만두고 튜브로 물감을 짜서 바르는 등의 기법을 실험했다. 그의 전 생애가 최고의 화업을 이루기 위한 샘플링 기간이었던 셈이다.

그의 동료 폴 고갱 역시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다 35세에 화가가 됐다. 평균수명 40대인 시절로서는 매우 늦은 시기였다. 고흐와 고갱의 오랜 탐색과 경험은 마침내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놨다. 늦게나마 자기만의 지향점을 찾아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개척한 것이다.
무기로 가득한 '다빈치 자소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 수학 건축학 해부학 군사학 분야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30세 때 밀라노의 공작에게 보낸 자기소개서에서 그는 10번까지 번호를 매겨 자신이 개발한 무기와 군사 장비를 설명하며 “경이로운 성능의 대포와 박격포, 이동하기 쉬운 교량, 포병 진지를 돌파할 덮개전차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예술적인 능력은 마지막 항목에 한 줄 써넣었다. 병기공학자로 고용된 그는 탱크와 투석기, 잠수함 등을 연구하며 설계했고,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걸작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도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어릴 때 선생님에게 “뭘 배우기엔 너무 멍청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는 한 번의 성공을 위해 1000번 이상의 시도를 거듭했다. 그는 훗날 “난 실패를 만 번 한 것이 아니라 가능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만 번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시 네 살이 넘어서야 말을 시작한 늦깎이였다. 청년 시절에는 취리히 폴리테크닉대의 조수 선발에도 떨어졌다. 이런 험로를 오래 거친 덕분에 노벨 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첨단기술이 발달하면서 지식의 반감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인간의 역할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 걸까. 앞으론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영역을 입체적으로 연결하고 그 접점에서 시너지 효과를 올리면서 남다른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빈치 네트워크’(잠재력 발휘 글로벌 운동)의 창립자 와카스 아메드는 이 같은 융합인재를 ‘폴리매스(Polymath)’라고 부른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총체적인 사고와 방법론으로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라는 의미다.
코로나 딛고 재기하는 이들에게
과학적 지식과 직관적 체험을 모두 중시한 철학자 스피노자는 17세기에 벌써 이런 원리를 간파해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가야금 명인’ 황병기로부터 들은 덕담도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였다.

사람마다 발전 속도가 다르다. 그러니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자. 이르거나 늦거나 간에 내 능력을 키워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그 비가 언제 내릴지 알 수 없지만 빗물은 늘 경험 많은 농부의 밭을 먼저 적신다.

조금 늦으면 또 어떤가. 그동안의 실패를 밑천 삼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코로나 사태로 폐업까지 내몰렸다가 재기에 나서는 자영업자가 많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이들에겐 더 큰 밭과 단비가 필요하다. 자연의 섭리(攝理)에는 ‘한 손(手)’으로 ‘세 귀(耳)’를 모아 듣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그 내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겐 “비가 가득하면 비로소 땅에 쏟아지리라”는 솔로몬의 잠언도 더 깊게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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