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 과 섬광] 우린 밤의 영주…열대야의 끝에서 여명을 밝힌다

입력 2022-08-09 17:18   수정 2022-08-10 00:08


아침은 누리에 가득하고, 수련이 흰 꽃을 피울 때 우리는 여름이 왔음을 알아챈다! 광장에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여름은 막 개막한 축제의 첫날처럼 소란스럽게 온다. 소나기를 맞으며 옥수수들은 키가 훌쩍 크고, 돌들은 내리쬐는 땡볕을 받아 달구어진다. 나는 열기를 피해 자주 숲을 찾는다. 큰 나무들의 우듬지와 무성한 잎들은 넓게 차양을 친 듯 하늘을 가린다.

햇빛은 그 차양의 틈을 뚫고 까맣게 익은 버찌 열매들이 으깨진 지면에서 빛난다. 매미와 쓰르라미들이 맹렬하게 울고, 그 울음들 사이사이 산비둘기들이 콘트라베이스처럼 저음으로 구구댄다. 몇 해 전 쓰러진 참나무에서는 버섯이 돋고, 그늘에서는 뱀들이 방전된 배터리처럼 더위에 지친 긴 몸뚱이를 늘어뜨린 채 휴식을 취한다.
한낮의 흰빛과 폭죽 같은 더위
여름의 흰빛은 명석하고 그 빛은 어디에나 일렁이고 넘친다. 숲에서 돌아올 때 소년들이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들뜬 목소리로 시칠리아의 바다와 흰 모래밭에 대해 떠드는 것을 보았다. 여름의 여행 일정 속에서 우리 기분은 부푼다. 정수리를 꿰뚫을 듯 강렬한 자외선과 한밤중에 찾아오는 열대야가 여름의 정수다. 이것들로 여름은 비로소 여름다워진다. ‘여름이다!’라는 짧은 탄성 속에서 계절의 기쁨은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여름은 저의 내밀함 속에서 돌연 우리 존재를 하나의 신체로 발굴해낸다. 오, 이것은 열과 땀을 내는 신체다!

여름밤 식구들이 거실에 모여 잘 익은 수박을 깬다. 식구들은 낮의 노동과 수고에서 무사히 돌아와 수박과 마주하는 것이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수박을 기리는 노래’에서 “물의 보석상자/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심오함의 창고/땅 위의 달”이라고 노래한다. 나는 여름밤의 기쁨이고 보람인 수박을 찬미한 시인에 공감한다. 수박은 제 내부에 많은 물을 움켜쥐고 있는데, 수박 한가운데를 쩍 가르는 순간 이 물은 우리의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붉은 보석 같은 수박의 속살을 탐하면서 우리 안의 고갈을 보충한다. 수박 한 통은 여름의 더위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다.

밤의 공간이 덧없이 펼쳐지고, 우리가 밤의 영주(領主)처럼 군림한다. 열대야는 여름밤의 불청객이다.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존재함에 들러붙은 불편인 열대야 속에서 우리는 무력해진다. 깨어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밤하늘의 어린 별들과 은하, 몇 억 광년 떨어진 데서 빛나는 산개성단과 구상성단들이 깨어 있다. 우리는 다만 밤의 깨어 있음 속에 노출돼 있을 뿐이다.
잠은 살아있는 존재의 은신처
열대야는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존재 사건이다. 이 여름의 판타지를 즐기기는 어렵다. 여름밤은 불면하는 이들에게 우정을 베풀지 않는 까닭이다. 잠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일종의 은신처다. 잠을 청하는 것은 장소를 자기의 존재 기반으로 움켜쥐고 소유하는 일이다. 잠은 한시적이지만 장소를 존재의 기반으로 변환시킨다. 세계의 신뢰가 담보되지 않을 때 잠은 위험한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그 장소가 제 안전을 위협하지 않으리란 보장 없이 동물들은 잠들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동물의 일원이다.

하지만 열대야가 인류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잠은 현재의 지속에서 존재를 잘라낸다. 이것은 작은 죽음이자 동시에 낮의 수고와 피로 속에서 좌초한 존재에게 열린 도주선이다. 우리는 작은 죽음이라는 길로 도망가는데, 이 도주는 휴식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는 작은 죽음을 고치 삼아 그 안에 존재를 한껏 웅크린 채로 탕진한 것을 채운다. 한 가지 위안은 열대야가 한시적이라는 점이다. 열대야는 지속된 열기로 인해 파생된 한시적 괴롭힘이다.

열대야는 우리가 몸-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몸으로 견디는 일의 괴로움에 대한 사유를 강제한다. 우리는 세포핵과 뼈와 장기(臟器), 즉 뇌와 심장과 위 따위를 감싼 피부 자아를 갖고 산다. 피부는 외부로 노출된 자아다. 프랑스 정신분석가인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자아는 피부다”라는 말로 그 사실을 고지한다. 체열이 오르면 피부의 땀구멍들이 일제히 열리고, 마치 백합조개가 개흙을 토해내듯이 피부는 땀을 토해낸다. 물론 이런 일이 존재의 내구성을 흔들거나 변형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열대야는 우리 잠을 잘게 찢어서 그 작은 조각들을 수거해 간다. 열대야가 수거한 잠에 대한 보상은 없다. 어둠 속에서 마주한 불면은 어떤 메마름 속에서 치르는 여름밤의 의례다. 불면이란 잠의 불가능성 속에서 촉지된 잠들 수 있는 가능성이다. 존재는 잠을 앞두고 머뭇거린다. 불면이 머뭇거림이고, 메마른 깨어 있음이라면 불면하는 자는 잠의 가능성 앞에서 그대로 방치된 불쌍한 존재다. 우리는 불면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표류한다. 이때 밤의 허공에서는 날것들과 물것들이 붕붕댄다. 불면은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우리를 더 강한 힘으로 누르고 조인다. 불면은 잉여의 의식이 바글거리는 틈이고, 잠들지 않음으로써 밤의 종교를 등진 배교자들은 그 틈에 웅크린 채로 허공을 노려볼 뿐이다. 불면의 메마름이 의식을 찢고, 고독의 응집 속에서 자아의 심지를 촛불처럼 태우는 일은 마뜩지 않다.
지난 기쁨과 불운도 딛고 가자
새벽의 미명 속에서 열대야의 끝이 열린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은 키 큰 짐승처럼 서서 수런거린다. 새벽이면 황혼 무렵 시작된 수리부엉이 같은 야행성 동물들이 사냥을 마치고 둥지로 돌아간다. 여름 새벽 일찍 잠에서 깬 작은 새들이 날개를 푸드덕이며 지저귄다. 새 소리는 여기에서 저기로 파동을 이루며 퍼져나간다. 누군가는 새의 울음소리는 두운이나 각운이 맞지 않음을 알아채고, 새들이 내는 울음소리의 질료성을 채집할 수 없으므로 좌절을 겪는다.

우리의 여름은 한 줌의 멜랑콜리를 남기고 덧없이 지나간다. 큰 욕망에 매달렸던 사람들이 참회하며 돌아온다. 바닷가에 몰린 인파가 사라지고, 숲에서 종일 울던 매미와 쓰르라미의 기척은 잦아든다. 황혼의 바닷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지금이 여름을 전송할 때임을 직감한다. 여름아, 흰빛들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과 꽃핀 배롱나무야, 잘 가렴! 여름과 전별하고 나면 광노출의 영향으로 피부에 일어난 색소침착도 가라앉아 우리는 여름 이전의 피부를 되찾는다. 어느덧 열대야와 불면의 괴로움도 희미해진다. 지난여름의 기쁨과 불운을 딛고 나가자. 우리에겐 새로운 여름을 기다릴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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