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안보 시대…미사일만큼 무서운 에너지 무기화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2-08-16 14:59   수정 2022-08-17 06:47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약 한 달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 여파로 “루블화(ruble)는 거의 즉시 잔해(rubble)로 변해 버렸다”고 공언했다. 서방 국가들은 SWIFT(전 세계로 돈을 이동시키는 국제 지불 시스템)에서 러시아를 축출하고,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을 동결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대로 러시아를 향해 “전례 없는 제재”를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마비되고, 국가 금융 시스템이 전면 붕괴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서방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루블화 가치는 바로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러시아의 무역수지 흑자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 행진을 거듭했다. 곧이곧대로 믿긴 어렵지만,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기관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80%를 웃돈다.

반면 미국과 동맹국은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는 물론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은 40%를 밑도는 극심한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다. 벌써부터 민주당 지지자의 64%가 2024년 대선에 바이든 대신 다른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 저하는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등 미국 내 경제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르네상스당은 최근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과반을 얻는 데 실패했다. 프랑스 집권당이 하원에서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마비될 위험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전면에는 ‘에너지의 무기화’가 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서방의 제재에 혼쭐이 난 러시아는 자급자족의 기반을 닦았다. 예를 들어 2013년에 러시아는 식량의 약 절반을 수입했다. 그러나 현재는 기본적인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곡물과 밀과 같은 품목은 주요 수출국이 됐다. 이를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전방위적 제제에 에너지를 앞세워 맞대응에 나섰다.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밸브를 죄는 방식을 통해서다. 독일에선 오는 겨울엔 국민들이 장작을 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

세계 경제에 풍요로운 성장을 가져왔던 시장 개방, 자유무역, 글로벌 분업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 자리를 탈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 블록화가 급속히 대체하고 있다. 이번 전쟁 여파로 각국은 식량과 자원을 무기화하는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에 돌입했다. 이런 지정학적 흐름의 변화는 우리에게 안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21세기에 탱크를 앞세워 국경을 넘는 전쟁이 일어난 사실도 놀랍지만, 자원의 무기화 앞에 EU의 리더십이 휘청거리는 것도 충격적이다. 북한 미사일 도발을 막는 국방안보도 중요하지만, 에너지와 식량도 미사일 못지않은 무기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가전이나 전자제품은 안 써도 되지만 먹거리나 땔감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전통적인 안보는 주로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고 국가와 국민을 보호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최근 국제 사회의 노골적인 에너지 무기화는 식량과 에너지를 포함한 인간안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군사 안보만으로는 국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에너지 공급은 전쟁만큼이나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변수다. 에너지기본계획 등을 통해서 국가 에너지 정책에 에너지안보 정책이 명시적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유병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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