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그날 젊은 병사를 감동시킨 모차르트 선율처럼…

입력 2022-09-06 17:26   수정 2022-09-07 00:59

내 영혼을 지금 이 모양으로 빚은 것은 무엇일까? 내 존재 어딘가에는 이방인 기질이 숨어 있다. 나는 주류가 아니고,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채 변방을 떠돌았다. 내 심연에 새긴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내 안에 품은 사람이 여럿이라는 뜻이다. 나는 아웃사이더, 추방 경험이 없는 추방자,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이’의 존재, 문턱에 있는 자 따위를 내 정체성의 일부로 수납하며 살았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법, 권위, 관습에 맞서고, 세계를 지탱하는 위계질서와 서걱거리는 관계로 살아온 까닭이다. 흠결 많은 영혼을 빚은 것은 나의 내면, 피의 기질과 본성, 그리고 시대, 부모, 제도 따위와 같은 사회적 환경일 것이다. 이런 성분들이 섞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나라는 ‘감성 인간’이 탄생하는 데 한몫 거든 것은 문학의 압도적 영향과 음악의 호혜를 빠뜨릴 수 없다.
'감성 인간' 키운 영혼의 자양분
제도 교육의 궤도에서 일탈한 17세까지 나는 대중가요나 팝송을 듣지 않았다. 심심할 때면 혼자 가곡을 불렀다. 스무 살이 되자 사는 건 비통한 투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영혼은 기댈 데가 없었다. 구멍 난 바지에 낡은 구두를 신고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은 랭보처럼 나는 떠돌았다. 오,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우연히 고전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급격하게 음악에로 기울었다. 롯시니의 ‘윌리엄 텔의 서곡’, 주페의 ‘경기병 서곡’,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장의 그림’ 같은 표제 음악을 즐겨 들었다.

스무 살 무렵은 내 고전음악 편력의 시작이다. 서울 시내의 음악감상실을 상갓집 찾는 걸인처럼 돌아다니며 종일 음악을 듣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음악을 듣기보다는 음악이 내 안에 차올랐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광화문의 ‘르네상스’, 충무로의 ‘필하모니’와 ‘티롤’, 명동의 ‘전원’, 명동성당 맞은편의 ‘크로이체’ 등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지고 내 회색빛 기억에나 남아 있는 추억의 장소다.

가장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음악은 다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위로를 준다. 음악, 이 숭고한 것! 마흔 해도 더 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독일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소설이었을 것이다. 한 청년이 징집돼 전쟁터로 나가는데, 우연히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감동한다. 청년은 그 곡 전부를 듣는다면 자기의 생 10년을 떼줘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전쟁터로 향하는 청년이 죽음을 넘어서서 음악에서 생에의 낙관과 찬란함을 보며 행복한 몽상에 사로잡히는 그 찰나에 공감했다. 나는 그 병사와 같이 음악에 빠져 음악에 구애하며 그 시절을 통과한다. 아직은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꼈던 게 분명하다. 음악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보람이고 구원이며, 적어도 서른세 살까지는 살아도 좋은 명분을 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삶이 급류처럼 위험할 때 친구
나를 음악으로 이끈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안의 ‘불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굴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에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떨었던 조상의 후손들이다. 청각은 불안과 공포 속에 깨어 있는 유일한 신체 기관이다. 어둠 속에서 나오는 음산한 소리들은 불안을 자극하고, 불안할수록 청각은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불안은 인류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DNA, 무의식의 유전 형질로 굳어졌을 테다. 이 불안에 칭얼거리는 어린 인류를 잠재우려고 어른들이 발명해낸 것이 자장가다. 그 자장가를 통해 인류는 음악의 뛰어난 효용을 발견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소리의 원형질로 빚은 우주적 질서이고, 심연의 궁극이며, 고요의 파동으로 영혼을 깨우는 직관적 선지식이고, 무상(無償)의 기쁨이며, 불안을 위한 처방전이다. ‘건반 위의 철학자’라는 명성을 얻은 러셀 셔먼은 <피아노 이야기>(김용주 옮김, 이레, 2004)에서 “피아노 연주는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긴 모험”(83쪽)이라고 쓴다.

음악은 인간 청각이 지닌 선험적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려고 생겨난 것이다. 선사시대 인간은 밤의 어둠에서 들려오는 여러 짐승이 이동하며 내는 소리, 공허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불안에 떨었다. 그 소리들은 날카롭고 공포를 자아내는 불협화음인 데 반해 음악의 소리는 우리의 불안을 달래고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준다.

음악은 인생의 누추함에 대한 보상이다. 음악을 안다는 것은 우주를 안다는 것이다. 삶이 급류처럼 위험할 때조차 우리는 음악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우면 우리는 그 포로가 된다.”(러셀 셔먼, 51쪽) 교향곡에서 다른 빛깔의 소리를 내는 악기들을 분별했을 때 정말 신기했다. 나는 음악의 수맥 속에서 피아노의 트릴을 듣고, 바이올린의 피치카토를 짚어냈다. 음악이라는 나무들이 내 안에서 자라는 동안 평범함이라는 일반명사에 지나지 않는 나는 청각을 두드리는 소음에서조차 음악을 찾아 듣는 영재, 음악의 총아, 일등 수혜자로 성장한다.
달팽이관 가득 차오르는 희열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괴테는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음악은 흐르는 건축이다. 음악은 마음이 복잡해서 숨고 싶을 때 숨어 있기 좋은 섬이다. 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들은 한결같이 침묵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음악은 내 속귀의 달팽이관 속에 소리가 아니라 침묵으로 차오른다.” 오, 숨어 있기 좋은 방이여, 내 달팽이관 속에 차오르는 기쁨의 소리들이여.

세상에 불시착해서 모욕과 불명예의 구덩이에서 나뒹굴 때 나를 구한 것은 음악이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음악의 기쁨을 깨친 것이다. 귀는 세상의 온갖 소음 속에서 음악을 분별해낸다. 아직 젊었던 어느 날 한밤중 청명한 연주가 들려왔다. 이웃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이다. 그 곡이 어찌나 슬프고 아름답던지! 베개에 머리를 대고 귀를 기울이다가 눈물로 속절없이 베개를 적셨다.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Chaconne In G minor)’였다.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들었을 때도 같은 감흥과 전율이 왔다.

음악이 궁극적 도덕학이나 고결한 영혼의 교과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음악이 불안과 고통을 경감시키는 묘약이라고 믿는다. 두 발이 진흙탕에 있을 때조차 고개를 들어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의 별처럼 음악은 숭고한 그 무엇이다. 오늘 오후엔 가을의 청명함을 기념하며 빨아서 깨끗해진 셔츠를 입고 바흐의 ‘무반조 첼로 모음곡(Suite for violoncello BWV1007~1012)’을 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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