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전황 역전"…72년전 인천상륙작전의 그날 [인천은 지금]

입력 2022-09-16 00:49   수정 2022-09-16 06:51


1950년 9월 1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 인천상륙작전. 지난 4년간 태풍과 코로나19로 중단됐던 야외 기념행사가 15일 인천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연수구 옥련동)에서 다시 열렸다. 해병대 1기 참전용사가 참가해 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려는 우리 국군들의 용맹성을 알렸다.

인천상륙작전은 경상도 낙동강까지 밀린 연합군과 국군의 대반격을 위해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 수도 서울 진입 작전이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수도 서울 탈환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상륙지점을 인천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이 작전에는 항공모함·구축함·순양함 등 세계 8개국에서 동원된 261척의 함정이 투입됐다. 당시 인천지역에 있던 북한군은 2000여 명에 불과해 아군의 피해는 적었으나, 월미도에 거주하는 양민들의 사상과 가옥들이 파괴되는 피해가 있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연합군은 북진의 기회를 잡았으며, 낙동강 전선에선 보급로가 차단된 북한군이 전투력을 잃고 북쪽으로 후퇴하거나 흩어지는 전환점이 된다.

인천시와 해군본부가 공동으로 개최한 전승 72주년 기념식에 앞서 월미도에 있는 해군첩보부대 충혼탑 참배와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헌화가 진행됐다.

해군첩보부대 충혼탑 참배에서는 이종호 해군 참모총장과 함영태 유족대표, 임형신 UDU예비역회장 등이 참석했다. 충혼탑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영흥도에 첩보활동을 했던 대원 등 350여 명의 해군첩보 부대 영령들을 기억하기 위해 2009년 건립됐다.

맥아더 장군 동상 헌화에는 이종호 해군 참모총장, 김태성 해병대사령관, 한기호 국회의원을 비롯한 참전용사 대표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 당시 해안 상륙작전이 쉽지 않은 인천을 선택했다. 인천이 서울과 인접해 북한군의 강한 저항을 감수해야 하고, 조수의 차가 커서 함정의 상륙이 쉽지 않다는 부하들의 반대의견을 설득했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 집중으로 인천 방어력이 약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략적·심리적·정치적 이유로 서울의 조기 탈환을 위해서 인천을 선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야외광장에서 열린 전승 기념식은 참전용사 대표 및 23개 참전국 국기 입장을 시작으로 전황 보고 영상 시청, 참전용사 회고사, 이종호 해군참모총장의 기념사와 유정복 인천시장의 축사, 헌정 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올해 참전용사 회고사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분대장으로 참전한 이봉식(93세)옹이 당시 용맹했던 한국군과 UN군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더 나은 인천의 내일을 위해 제2의 인천상륙작전을 다시 펼치겠다”고 말했다.

인천=강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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