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보기엔 좋지만 아이들에겐…" 안전한 놀이터의 '배신' [오세성의 아빠놀자]

입력 2022-09-17 07:19   수정 2022-09-17 09:45


최근 저녁마다 선선함이 감도는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퇴근 후 딸아이와 놀이터에 가면 땀을 흠뻑 흘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불편은 한결 덜었습니다. 대신 고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놀이터를 자주 다녀서 그럴까요. 딸아이가 놀이터에 쉽게 흥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말타기 놀이기구를 몇 번 흔든 뒤 시소에 한 번 올라타고, 미끄럼틀을 두어번 타면 놀이터에 갓 도착했을 때의 열의가 사라집니다. 조금씩 짜증도 내더군요. 그런 조짐이 보일 때마다 아빠는 "어흥~ 괴물이다! 잡으러 간다!"를 외치며 괴물이 되어 줍니다. 딸아이는 그제야 꺄르르대며 열심히 도망다니죠.

거의 매일 저녁마다 놀이터로 나온다고 하지만, 고작 18개월된 아이가 놀이기구를 지루해 한다는 점은 다소 의외였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놀이터를 가보면 좀 다를까 싶어 지난 명절 연휴에 근처 다른 놀이터도 다녀왔습니다. 입주가 한창 이뤄지고 있는 새 아파트 단지였는데, 다양한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다만 딸아이는 그곳에서도 금새 흥미를 잃더군요.

지난 3일 [오세성의 아빠놀자]가 나간 뒤 한 독자분도 이메일을 통해 비슷한 고민을 전해주셨습니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원통형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고 놀이기구 지붕에도 오르려 하는데 그런 위험한 행동을 어디까지 허용해줘야 하느냐는 고민이었습니다. 아이가 미끄럼틀이나 그네, 시소 같은 놀이기구에서 충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놀이터에 가면 위험한 행동을 하는데 이를 어느 정도까지 봐줘야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독자분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어린이 놀이터 전문가인 배송수 한국놀이시설안전기술원장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행정안전부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검사기관 기술협의회 위원장으로 국내 놀이터 안전제도를 만들고 있는 배 원장은 "아이들이 위험하게 노는 것이 당연하다. 막아도 소용없다"며 "안전한 놀이터가 되레 아이들을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전한 놀이터가 아이들에게 위험이 된다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배 원장은 "매년 놀이터 사고를 분석하면 98% 내외는 이용자의 과용과 오용, 실수 등으로 발생한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놀이기구가 아이들에게 과용과 오용을 유발하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국내 어린이 놀이시설의 안전 규정이 너무 엄격한 나머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기형적인 놀이터가 탄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박진감과 스릴을 추구하는데, 엄격한 법규로 인해 그런 재미를 줄 수 없는 유아 수준의 놀이터가 양산됐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이들은 재미를 추구하고자 기구 위로 올라가는 등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이는 사고로 이어진다는 주장입니다.

딸아이와 다녀온 새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 대해서도 "어른들 보기에 좋고 관리하기도 편하도록 지어진 놀이터"라며 "아이들 시각에서 보면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아이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할 놀거리가 없기에 기구 위로 올라가는 등의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놀이터가 좋은 놀이터일까요. 배 원장은 '아이들이 도전할 요소가 있고, 아이들이 직접 바꿀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된 가변적인 놀이터'를 이상적인 놀이터라고 제시했습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소로는 유아숲체험원과 모래놀이터를 꼽더군요. 유아숲체험원은 아이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모험놀이터 개념이 담겨있고, 모래놀이터는 모래산을 쌓고 구덩이를 파는 등의 가변 요소가 있다는 설명입니다.

과거 놀이터를 생각하니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초등학교나 놀이터에 있던 정글짐은 떨어질 경우 철봉에 부딪혀 크게 다칠 수 있음에도 많은 아이들이 정상에 올라가고자 도전했습니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고, 그러한 노력 끝에 정상에 오르면 뿌듯한 쾌감이 따라왔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겠습니다만, 기자의 경우 방치된 공사장에 아지트를 만들어 놀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에는 상권 조성을 위해 공사 자재를 쌓아두고 방치하는 장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허허벌판에 아파트만 들어선 탓에 놀거리가 부족했던 아이들은 주변에 널린 거푸집과 원목 팔레트 따위를 쌓아 비밀기지를 만들고 놀았죠. 얼마 뒤 그 장소는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대형 학원가로 거듭났습니다. 지금 시선에선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따금 그 장소를 찾을 때면 당시의 즐거움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배 원장은 "아이들이 도전과 위험을 추구한다는 사례"라며 "그것이 재미이고 놀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전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는 놀이가치를 소홀히 해선 안된다는 것이죠. 재미를 추구하며 다소의 위험을 겪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많습니다.

유럽표준위원회(CEN)는 '최소한의 손상은 아이가 배우는 과정의 일부'라고 규정했고 영국도 놀이시설 안전기준(BSI)에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위험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타박상은 물론 골절까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의 범주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놀이를 통해 위험과 긴장을 겪으면 집중력과 창의성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더군요.

우리나라도 어린이 놀이터에 놀이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배 원장은 "연말이면 연구과제가 완료될 것"이라며 "연구 결과가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 등에 반영된다면 어린이놀이터가 보다 재미를 주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도 아이들에게 뛰어놀 권리와 실패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국회에서 관련 법이 개정되어야 하는 문제이고, 이미 설치된 놀이터가 많기에 당장 큰 변화가 있긴 어려울겁니다. 그래도 아이에게 보다 많은 선택권을 주려는 노력은 시도할 수 있겠죠. 세탁이 쉬운 옷을 한 벌 준비해 이번 주말 딸아이와 모래놀이터를 다녀올까 합니다. 모래가 아주 깨끗하진 않겠죠. 아이 손 한번 더 씻겨주고 옷도 꼼꼼히 세탁하는 수고가 들겠지만, 아이의 환한 웃음이면 충분한 보상이 될 것 같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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