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삶이 축제라면 그건 고통의 축제다!

입력 2022-10-18 18:16   수정 2022-10-19 00:03

어느 날 갑자기 고통은 감염이나 고문으로 통증의 지배 아래에 있는 몸을 발명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고통은 삶의 기본값이다. 어머니에게서 몸을 받고 태어나는 찰나 우리는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출생에 따른 비용 청구서를 받는다. 그 비용은 죽음과 고통에 지불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이 다양하듯이 그 형태 역시 다양하다. 배제와 소외에서 오는 사회적 고통, 가난의 압박감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 암세포가 자라면서 오는 실체적 고통…. 달콤한 사랑조차도 날카로운 고통으로 변한다.
아무리 짧아도 긴 고통의 찰나
몸은 고통을 날조하지 못한다. 통증은 감염되고 훼손된 몸을 하나의 영토로 지배한다.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이고, 찔리고 베인 신체에 날것의 경험으로 개입하는 명료성이며, 항상 끝을 유예시키는 지루한 무엇이다. 고통의 찰나는 아무리 짧아도 길다. 그것이 극한일 때 외마디 부르짖음, 통곡이나 비명으로만 제 존재를 드러낸다.

신체적이든 심인성이든 우리는 고통을 회피한다. 고통 회피는 우리 안에 내재된 본능이다. 우리가 회피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 공포일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니 피와 심장, 피부라는 막에 싸인 채 존재하는 나란 인간은 고통을 잘 모르고 산 듯하다. 고통을 안다는 게 존재의 비밀과 통한다는 뜻이라면 그 말은 맞다. 고통, 이 복합적인 것의 발생학을 숙고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한 존재가 사회와 맺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다.

한밤중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은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이다. 통증은 목구멍에 집중됐다. 목구멍을 칼로 찢는 듯한 인후통은 내가 겪은 최고의 고통이었다. 의사는 염증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진단에 이어 즉시 입원을 명령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병실이 배당되고, 환복을 하고 침상에 눕자마자 바로 간호사가 와서 손등 혈관에 링거 바늘을 꽂고 수액과 항생제를 투여했다.

친절한 간호사는 채혈하거나 링거를 꽂을 때마다 “조금 따끔하고 아플 거예요”라고 말했다. 주삿바늘이 혈관을 찌를 때 통증은 뚜렷했다. 고통은 통증으로 포화된 존재의 나락이고, 명료한 체감으로 덮치나 독해는 허용하지 않는 수수께끼다. 다만 우리는 고통의 스펙터클이 몸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고투의 물증이고, 면역 체계의 히스테리로 발현하는 것임을 안다.

고통 속에서 떠올린 것은 한 알의 진통제가 아니라 우습게도 포도주 한 잔이다. 고통과 대척적인 자리에 포도주가 있다. 포도주는 밋밋한 생활을 떨치고 일어나 마시고 도취하는 가운데 비상한 활력과 금빛 기쁨의 날개를 달고 솟구치게 하는 영약이다. 고통이 빚는 나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포도주의 위력에 기댔던가?

지금 이 순간 포도주 한 잔을 들이켤 수 있다면! 유리잔을 채운 식물의 정령, 그 붉은 진액을 삼킬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포도주를 마시는 상상에 매달리며 한 시인이 포도주를 두고 노래한 시를 떠올렸을까?



보들레르는 포도주의 혼에 빙의돼 그 생리학을 꿰뚫어본 뒤 “술은 하찮은 ‘인류’를 통하여/눈부신 팍토르스 강, 황금의 강이 되어 흐르네/술은 인간의 목구멍을 통해 제 공훈을 노래하고/여러 혜택 베풀며 진짜 임금처럼 군림하네”라고 노래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벗들과 포도주를 마시며 젊음의 고양과 기쁨의 도취 속에서 사랑의 시를 쓰고 우정의 노래를 불렀던가. 다시 한번 “사랑과 영광의 노래가 용솟음치게” 하고, “반은 한량, 반은 군인”의 혼을 지닌 이것, 일요일의 행복과 느긋함을 베푸는 이 묘약을 들이켤 기회가 온다면!

누구도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는 타인의 감각중추에 머물 수는 없다. 고통은 혼자 방치되는 가운데 겪는 외로운 경험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죽기엔 너무나 많은 기회가 남아 있고, 살아 있기엔 너무나 고갈됐음을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고통을 두고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전달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36쪽. 재인용)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는 있으나 타인의 고통을 내 것인 듯 생생하게 겪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건강이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이 매개하는 몸의 취약함과 너덜너덜 해진 자아와 분리된 잉여다. 건강하다는 것은 그 잉여를 상시적으로 누린다는 뜻이다. 건강한 사람은 몸의 일부로서의 고통을 모르고 삶의 밀도도 알지 못한다. 내 맘대로 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 너머에 고통이 있다.

통증의학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고통은 생을 새롭게 산출하는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의 닫힌 지각기관을 열고 존재의 은폐되는 비밀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고통의 여러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일종의 치유력임을 깨닫게 한다. 고통이 둔중한 정신을 깨우고, 삶이라는 복잡한 족쇄에서 해방시키며, 우리는 고통의 예민함 속에서 삶의 생생함을 경험할 수 있다.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면 생존의 안락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살아 보자, 더욱 …'
고통스러운 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 창밖의 푸르스름한 여명을 바라보는 눈에서 눈물이 솟는다. 아, 살았구나! 내 삶은 어제 끝나지 않고 오늘을 건너 내일로 이어진다. 긴 통증을 이기고 새 아침을 맞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견딜 만한 크기로 줄어들고 빈도는 잦아들었다. 고통이 스쳐간 자리에 평화가 내려앉고, 세상은 숭고한 행복에 잠겨 있는 듯 보인다.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안도한다. 삶이 축제라면 그건 고통의 축제다! 삶의 심연과 의미에로 이끄는 고통을 긍정하는 한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부디 고통에 지지 말자. 고통에 삼켜지지도 말자. 고통의 늠름한 수용 속에서 삶은 찬란해진다. 그러니 살아 보자, 더욱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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