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발가락으로 호른 연주…경이로움 선사한 클리저

입력 2022-11-10 13:50   수정 2022-11-10 13:53


“모든 약점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한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계는 우리가 자신에게 부여한 것뿐입니다.”

독일 출신의 호르니스트 펠릭스 클리저(31·사진)는 연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다. 두 팔 없이 태어난 클리저는 뛰어난 호른 연주로 13세에 하노버 음대 예비 학생으로 입학한 수재다. 2016년에는 독일 명문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음악제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상을 받았다. 2018년부터는 독일 뮌스터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연주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클리저는 누구보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박수 소리에 화답하듯 옅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 앉은 클리저는 구두를 벗고서 왼쪽 다리를 얼굴 위치까지 올렸다. 왼팔 대신 호른 밸브를 누르기 위해서다. 이후 고정된 지지대 위에 놓여 있는 호른에 입을 갔다 댄 그는 숨을 불어넣었다. 클리저의 첫 호른 선율은 장애 탓에 실력이 조금은 높게 평가됐을 것이란 편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연주를 감상한 뒤 의심과 호기심은 경이로움과 확신으로 변했다.

우선 호른 특유의 진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구현하는 실력이 압권이었다. 첫 연주곡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에서는 시작부터 두텁고 따뜻한 호른 소리가 홀 전체를 감싸 안았다. 작품 중간중간에 나오는 고음도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기 위한 강약 조절은 노련했고, 오직 입으로 제어하는 아티큘레이션도 귀에 명확하게 꽂혔다. 연주 중 클리저는 고개를 살짝씩 돌려가면서 특정 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냈다. 통상 호른은 연주자의 오른손에 의해 음색이 조절되는데 이를 온전히 입술의 형태나 호흡으로 제어해야 하기에 이뤄진 움직임이었다.

예민하고도 명료한 음색은 연주자의 엄청난 연습량을 짐작하도록 했다. 첫 연주가 끝나고 클리저가 무대 뒤로 잠시 자리를 비우자 관객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반응과 소리에 감동했다는 말이 뒤섞여 있었다.
뒤카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빌라넬라’ 연주에서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호른 소리가 귀를 황홀하게 했다. 비교적 단순한 선율을 아주 긴 호흡으로 연주하면서 평온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만들어 낸 결과였다. 빠른 음표가 연이어 등장할 때 그의 발가락은 어떤 이의 손가락보다 민첩했다.

발가락은 손가락보다 훨씬 짧고 둔하기 때문에 따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은데, 클리저의 연주에서는 모든 음정이 명료하게 귀에 울렸다. 클리저는 연주 중 약음기(음을 약하게 하는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 오른발로 옆에 자리한 또 하나의 지지대를 호른에 가까이 가져다 놓고 다시 멀리 두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온몸을 사용해 음악을 전하는 모습이었다. 슈트라우스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에서는 몽환적인 선율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작품 중간중간 음을 상행하며 소리를 밀 듯이 표현하는 그의 연주는 더할 나위 없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베토벤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라인베르거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서 빠른 음표가 약간씩 뭉개지거나 음정이 살짝 맞지 않는 등 잔 실수가 나왔다. 그러나 전체 음악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클리저의 경우 빠른 템포에서 왼발은 물론 입술의 위치까지 계속해서 바꿔가며 연주했단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준의 기교를 펼쳤다. 클리저는 이날 호른 작품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밝고 가벼운 분위기도 완벽히 소화해내면서 연주 스펙트럼이 넓은 호르니스트란 점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그의 호른이 내뿜는 아름답고도 그윽한 선율에 객석에서는 깊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신비로운 분위기 속 정확하고도 선명한 고음이 등장할 때는 순식간에 공기가 환기되는 시원한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단단하면서도 아주 멀리까지 나가는 클러저의 고음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었다. 아울러 작은 소리 안에서 여러 음색을 조절하다가도 금세 무거운 코끼리가 등장하듯 소리를 키우면서 웅장함을 표현하는 그의 실력은 놀라울 뿐이었다.

클리저가 준비한 연주의 마지막 음을 내뱉고 10초가량 움직임을 멈추자 객석에서는 긴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클리저가 미소 짓자 관객석에서는 “브라보” “앙코르” 등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뜨거운 환호에 클리저는 “이태원 참사에 슬픈 한국이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말한 뒤 생상스의 ‘로망스’를 연주했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일부 관객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땀에 흠뻑 젖은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야 그의 자세가 연주는 물론 가만히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공연 내내 밝은 표정과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클리저가 온전히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클리저는 오는 12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조재혁과 듀오 리사이틀을 갖고, 14일에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2번을 협연한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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