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얽혀있는 '인간지네' [이선아의 걷다가 예술]

입력 2022-11-20 18:22   수정 2023-04-26 11:39


지난 7월 국내 트위터 사용자 사이에서 난데없는 ‘기괴한 조형물 배틀’이 벌어졌다. 어떤 조형물이 가장 희한하게 생겼는지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작품 사진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때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 서도호(60·사진)의 ‘카르마(karma)’다.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입구에 있는 이 작품 사진은 1만 번 넘게 ‘리트윗(퍼가기)’됐다.

높이 7m가 넘는 이 조각은 동서남북 방향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4명의 사람 위로 수많은 사람이 쪼그려 앉은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깨 위에 올라탄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의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다. 거대한 ‘인간 띠’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일본 공포만화에서 나오는 ‘인간지네’란 별명은 이래서 붙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상당한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수많은 행동과 연관돼 있다’는 동양적인 사고를 시각화했다는 설명이다. 작품 제목인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업보’라는 뜻이다. 목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과거 속의 나’다.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나는 열매를 맺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한다. 이른바 인과응보다. 눈을 가린 건 한 치 앞의 미래조차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뜻한다.

그래서일까. 서도호는 미술계에서 ‘공간에 시간을 담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리움미술관에서 선보인 작품도 그랬다. 당시 백남준 등 작고한 거목들의 전시만 열었던 리움미술관은 이례적으로 ‘젊은’ 서도호의 단독 개인전 ‘집 속의 집’을 열었다. 그는 얇고 반투명한 폴리에스테르 천과 견사를 사용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서울 성북동 한옥, 해외에서 유학하며 살던 베를린·뉴욕 집을 만들었다. 건축물은 ‘한 자리에 고정돼 있는 견고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한없이 연약하고 망가지기 쉬운 물질을 통해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장소들을 리움으로 옮겨왔다.

이런 독창적인 접근은 서도호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미술가’란 타이틀을 안겼다. 그는 수묵화계의 거장인 고(故) 서세옥 화백의 장남이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기대지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난 작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 화단도 사로잡았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미술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등 세계적인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도호에게 인간은 정해진 운명에 속박된 수동적 존재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카르마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탱하고 있는 맨 밑의 사람은 다부진 몸매로 힘차게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운명에도 그는 발걸음을 내디딘다. 미술평론가 홍경한은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카르마는 쉽사리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인간임을 말한다. 오늘은 벅차고 내일은 불안한 현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굳세게 걷는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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