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거장'의 정글북은 화려했지만 무거웠다

입력 2022-11-20 18:22   수정 2022-11-21 00:16


방글라데시계 영국인 아크람 칸(48)은 인도 전통무용 카탁(Kathak)과 현대무용을 접목한 독창적인 안무 스타일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무용가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공연에서 파격적인 안무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5세 때 창단한 ‘아크람 칸 컴퍼니’ 이름으로 내놓은 혁신적인 작품들로 예나 지금이나 공연계의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칸은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무용가다. 2004년 ‘대지 Ma’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국내 관객과 만났다. 특히 LG아트센터와 인연이 깊다. ‘신성한 사람들’(2007), ‘in-i’(2009), ‘버티컬 로드’(2011), ‘데쉬’(2014) 등 그의 대표작이 서울 역삼동 옛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다. 지난 10월 마곡동으로 옮긴 LG아트센터는 주 공연장인 LG시그니처홀에 올릴 첫 해외 초청작으로 칸의 신작을 ‘찜’했고, 지난 18~19일 그가 만든 ‘정글북: 또 다른 세계’가 올랐다.

이 작품은 칸의 이전 내한 공연과는 여러모로 결이 달랐다. 우선 칸이 춤추는 모습이 사라졌다. 지난 4월 영국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그가 2020년 1인 장편극 ‘제노스’를 끝으로 ‘무용수 은퇴’를 선언한 이후 발표한 첫 연출·안무작이다.

내용 면에서는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연령대를 관객층으로 삼는 ‘가족극’을 표방한 점이 가장 달랐다. 이전 공연은 하나같이 성인을 대상으로 했다. 칸은 프로그램북에 실린 ‘연출 노트’에 “모든 문화권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소재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고전 ‘정글북’이다. 칸은 정글북 이야기를 ‘자연 존중’과 ‘정치적 올바름’을 단골 주제로 삼는 요즘 영미권 예술계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했다. 배경은 인도 시오니 정글이 아니라 기후 재앙으로 문명이 파괴된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기후 변화에 따른 대홍수로 바다에 빠졌다가 고래가 구출해준 어린 소녀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온갖 동물과 실험실 출신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땅에 닿는다. 주인공 모글리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다. 모글리의 친구인 검은 표범 바기라와 비단뱀 카아도 암컷이다.

줄거리의 뼈대와 주요 캐릭터는 원작에서 많이 따왔다. 동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모글리는 실험실 원숭이에게 납치당했다가 바기라와 불곰 발루, 카아에 의해 구조된다. 모글리는 지혜를 발휘해 정글을 위협하는 사냥꾼을 물리친다. 원작의 악역인 늙은 호랑이 쉬어 칸은 빠졌다. 자연과 동물을 괴롭히는 악당은 ‘인간’뿐이다.

공연은 춤과 연극, 애니메이션이 결합한 융합극 형태로 펼쳐졌다. 무대 위에 오른 10명의 배우 겸 무용수는 사전에 녹음된 내레이션과 대사, 음악에 맞춰 연기하고 춤을 췄다. 무대 앞의 투명한 막과 뒤편 배경막에 각각 투사된 애니메이션 영상들은 독립적으로 극을 전개하거나 무대 연기와 합해졌다.

연극적 기법을 활용한 기발한 연출과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술의 효과적인 활용, 재기 넘치는 무용수들의 뛰어난 앙상블 등 아크람 칸 컴퍼니가 그동안 보여준 특장점이 유감없이 드러난 무대였다. 거대한 코끼리 떼가 이동하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장면 등에선 독특한 애니메이션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가 입체적으로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세계를 구현했다. 무대 위에 하얀 비닐을 깔고 배우들이 양옆에서 펄럭이게 하는 것만으로 사냥꾼이 파도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준 마지막 장면은 아날로그 기법으로 창출하는 연극적 효과의 재미를 선사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대사나 영상 없이 무용수들이 오롯이 추는 군무였다. 늑대와 표범, 원숭이 등 동물을 연상시키는 역동적 몸짓과 인도 전통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유연하고 유려한 동작 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칸의 창의적인 안무와 무용수의 뛰어난 표현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런 시각적 향연의 즐거움을 반감시킨 것은 단조로운 플롯과 문명 비판적·도덕적 메시지가 과도하게 담긴 대본이었다. 내레이션과 대사가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설명조였다. “인간은 이 행성에 잠시 머무르는 손님일 뿐, 자연과 다른 종(種)을 존중하라”는 내용이 되풀이되고, 극 후반부에는 반전(反戰) 메시지까지 더해졌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이 즐기기에도 극이 무겁고, 서사적인 재미가 부족했다. 약 120분의 공연(인터미션 제외) 중 객석에서 웃음이 나온 건 ‘발루’ 역의 톰 데이비스-던이 탁월한 몸짓 연기로 잠시 너스레를 떤 순간뿐이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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