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테크의 황제'…자식 손주로 '대박'난 이 남자의 비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2-12-10 08:30   수정 2023-04-27 16:25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 제국), 광개토대왕(고구려), 칭기즈 칸(몽골 제국)….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정복 군주라고 부릅니다. 전쟁에서 계속 이겨서 드넓은 땅을 얻은 왕에게 보내는 찬사죠.

그렇다면 이 남자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는 전쟁보다 결혼을 택했습니다. 자기 자식과 손주들을 모조리 정략결혼 시켰고, 그 자신마저도 정략결혼의 장기 말로 활용했죠. 덕분에 이 사람의 손자는 자타공인 유럽 최강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혼(婚)테크 지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1459~1519) 얘기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략결혼으로 유명하다는 얘기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남들은 싸우도록 놔둬라. 그대 축복받은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문구도 잘 알려져 있죠.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결혼정책을 펼친 인물이 막시밀리안입니다. 그가 자손들을 장가, 시집 잘 보낸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200여년간 유럽대륙 대부분과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까지 포함하는 최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신의 인생도 파란만장한 영웅의 삶이었습니다.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막시밀리안의 삶을 조명합니다.
‘전설의 혼테크’ 서막을 올리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3세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아래턱과 아랫입술이 유난히 튀어나온 인물로, 자손들에게 ‘합스부르크 주걱턱’을 물려준 주인공입니다. 주걱턱이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에는 “비가 오면 입안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간다”는, 조롱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얘기도 있었죠. 그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답게 결혼 잘하고 잘난 자손 낳는 데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포르투갈 왕족과의 사이에서 막시밀리안 1세를 얻은 거죠.

나중에 ‘이 시대(중세) 최후의 기사’로 불리며 존경받는 막시밀리안은 의외로 어린 시절 늦된 아이였습니다. 9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고, 지금으로 치면 주의력결핍 행동장애(ADHD) 증상도 보였습니다. 막시밀리안이 12살 때 아버지는 “아무래도 내 아들이 좀 바보인 것 같다”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곧 멋진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매부리코와 주걱턱 때문에 꽃미남은 아니었지만 남자다운 외모를 뽐냈고, 키는 6피트(183cm)가 넘었습니다. 성격도 쾌활하고 당당해서 이성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신체 능력도 탁월했는데 이를 과시하기 위해 높이 162m에 달하는 독일 울름 대성당의 꼭대기에 올라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9세기에 이 일화를 읽고 감동을 한 오스트리아 장교 두 명이 같은 곳에 올라갔다가 둘 중 하나는 떨어져 죽었다니, 웬만한 체력으론 어려운 일이었겠죠.

프리드리히 3세는 1473년 이런 막시밀리안을 부르고뉴 공작 가문의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약혼시키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부르고뉴 집안은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역을 지배하는 유럽 최고의 부자 가문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독립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결혼은 부르고뉴의 독립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는 행동이었죠. 부자 동네가 짐 싸서 떠난다는데 왕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이 약혼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원수 관계가 됩니다.
막시밀리안, ‘백마 탄 왕자’ 됐지만…

4년 뒤인 1477년. 막시밀리안의 장인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정세가 급변합니다. 프랑스 왕은 “신하가 죽었으니 남긴 땅은 왕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킵니다. 막시밀리안은 “아버지를 잃은 내 약혼자를 지키겠다”며 곧바로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 당시 막시밀리안은 18세, 마리는 20세였습니다. 둘은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어를, 마리는 독일어를 못해서 말이 안 통한다는 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리는 활발하고 유쾌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남편에게 부르고뉴의 선진 예술을 소개해 줬습니다.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거나 같이 로맨스 소설을 읽기도 했죠.

막시밀리안은 자칫 ‘혼테크남’ 취급받으며 무시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돈을 노리고 마리와 결혼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었거든요. 하지만 프랑스 왕이 전쟁을 일으키자 막시밀리안의 이미지는 ‘욕심쟁이 침략자에 맞서 아내를 구하는 백마 탄 왕자’가 됩니다.

막시밀리안은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고, 1481년 결정적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부르고뉴 지방과 네덜란드·벨기에 땅 등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을 확보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셋째를 임신 중이던 마리가 평소처럼 취미인 사냥을 하러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거죠. 아내가 다쳤다는 얘기에 막시밀리안이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마리는 “별로 안 다쳤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리는 1482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결혼으로 세계를 정복하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슬퍼서 현실을 부정했던 겁니다. 혼이 반쯤 나간 채로 장례식을 치른 막시밀리안. 그제야 네 살배기 아들 펠리페 1세와 두 살배기 딸 마르가레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과 가문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막시밀리안은 이렇게 다짐했을 겁니다.

그는 신들린 듯한 결혼동맹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결혼 상대를 기막히게 고른 건 물론이고, 기적 같은 행운이 잇따랐습니다. 가장 큰 성과가 1496년 스페인 왕가와 겹사돈을 맺은 겁니다. 아들과 딸을 카스티야와 아라곤(지금의 스페인)을 갖고 있었던 후안·후아나 남매와 동시에 결혼시킨 거죠.

스페인과 튼튼한 동맹을 맺자는 의도였지만 이들의 결혼이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사위가 결혼 몇 달 뒤 사망했고, 아들도 1506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아들에게 의부증 증세를 보이던 며느리는 반쯤 미쳐버렸고요. 하지만 아들 내외는 카를 5세(첫째 손자)와 페르디난트 1세(둘째 손자)를 비롯해 여섯 명의 아이를 남겼습니다. 홀몸이 된 막시밀리안의 딸이 이들을 성심껏 키웠습니다.

이런 상황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스페인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천운(기존 스페인 왕가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마틴 래디는 “자칫하면 합스부르크 제국이 찢어질 수도 있었던 도박이었다”고 말합니다. 딸과 사위 사이에 아들이 생겼다면, 그 아들은 스페인을 물려받는 건 물론 합스부르크 땅 일부를 가져갔을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운명은 막시밀리안의 편이었죠.

또다시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벌어집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둘째 손자를 보헤미아(지금의 체코)·헝가리·크로아티아를 지배하던 가문의 딸과 결혼시켰는데요. 왕위 계승권자가 전쟁에서 사망하면서 이 넓은 땅의 지배권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온 겁니다.

막시밀리안의 첫째 손자인 카를 5세(1506~1555)에 이르러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최강자로 등극합니다. 플랑드르 지방과 중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비롯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새로 개척한 식민지인 아메리카 대륙·필리핀까지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옵니다.

막시밀리안은 그 자신조차 장기 말로 활용했습니다. 마리가 죽은 뒤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부자 가문의 딸과 재혼한 겁니다. 결혼 지참금으로 100만 플로린이 들어왔는데, 현대로 따지면 5000억원은 족히 되는 돈입니다.
500년 뒤 한국에 온 ‘미디어 황제’

막시밀리안은 평생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군사와 법, 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펼쳐 제국의 토대를 닦았죠. 결혼 정책에만 힘쓴 것 같지만 전쟁도 굉장히 많이 벌였습니다. 40년 동안 벌인 전쟁 수가 무려 27번입니다. 다른 나라의 견제를 덜 받고 결혼 정책을 유리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실력 행사’ 덕분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자신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의 죽음 이후 그는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마리를 그리워했습니다. 자손들이야 유럽을 지배했지만, 수없이 많은 전장을 오갔는데도 생전 자기 손에 들어온 건 많지 않았고요. 1501년 낙마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뒤부터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1514년부터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어딜 가나 자신의 관을 들고 다녔죠. 151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이듬해인 1519년 세상을 떠납니다.

막시밀리안은 생전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많은 미술품을 모았습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마리 덕분입니다. 마리는 예술을 보는 막시밀리안의 안목을 틔워줬고, 막시밀리안은 예술 후원이 가문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독일의 ‘국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에게 목판화 ‘막시밀리안 1세의 개선문’을 만들게 한 뒤 홍보 자료로 쓴 게 대표적입니다. 돈이 없어서 진짜 개선문을 짓지 못하니 만든 대용품이었지만, 이를 접한 각지 국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미디어의 황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쇄 매체를 통한 선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통치자”(역사가 래리 실버)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계속 이어졌습니다. 후손들은 대대로 전 유럽의 명작들을 긁어모았고, 오스트리아의 근대화를 이끈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미술품들을 파격적으로 일반 국민에게 공개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빈미술사박물관을 지어서 가문의 소장품을 한데 모았고요.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전시가 또 달리 보입니다. 한 남자의 결혼과 사랑이 예술품 수집으로 이어지고, 그와 자손이 모은 작품들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또 몇백년 뒤 머나먼 한국에 와서 벌써 10만명 넘는 사람이 봤다니…. 인간사, 참 알 수 없네요. 다음 주 기자코너에서는 막시밀리안 1세의 며느리, 후아나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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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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