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와 셔우드 홀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2-12-20 18:04   수정 2022-12-21 01:01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으로 유명한 그가 크리스마스 특집용 단편을 써 달라는 뉴욕타임스의 청탁을 받았다. 마감 날짜는 다가오는데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그는 단골 담뱃가게 주인 오기 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오기가 ‘점심 한 끼’ 값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경험담을 들려줬다.

12년 전, 오기는 담뱃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도망가던 좀도둑의 지갑을 주웠다. 몇 달 뒤 크리스마스 때 그는 지갑을 돌려주려고 주소지를 찾아갔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자 눈먼 할머니가 문을 열며 “로버트, 너냐?”라고 물었다. 이어 “네가 올 줄 알았다. 크리스마스 때는 에슬 할미를 잊지 않을 줄 알았다”며 팔을 벌렸다. 그는 엉겁결에 “맞아요. 에슬 할머니”라며 함께 껴안았다.
상처와 희망 안고 사는 사람들
집 안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가득 사 와서 만찬을 준비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는 “담뱃가게에 일자리를 얻었고 곧 결혼할 것”이라며 듣기 좋은 대답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난 네가 뭐든지 잘해 낼 줄 알고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춥고 외롭고 쓸쓸한 크리스마스 날, 눈까지 먼 할머니 집에서 팔자에 없는 가짜 손자 노릇을 하는 동안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따스함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본 할머니도 오랜만에 가족의 온기를 느끼는 듯 마냥 행복해했다. 둘은 진짜 혈육이 된 것 같았다.

한참 뒤 화장실에 간 그는 최신형 카메라 상자 6~7대가 뜯기지 않은 채 놓여 있는 걸 봤다. ‘좀도둑 손자’가 예전에 훔쳐서 쌓아놓은 게 분명했다. 평생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는 그는 그중 하나를 안고 나왔고, 할머니가 깰까 봐 조용히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둔 채 돌아왔다.

이후 그는 매일 오전 7시에 가게 앞에서 같은 풍경을 같은 앵글로 찍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어느새 4000장이나 됐다. 그는 이를 앨범 속에 날짜별로 차곡차곡 정리해뒀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그걸 보고 폴은 ‘오기가 찍은 것이 곧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얘기는 1990년 뉴욕타임스 크리스마스 특집판에 실렸다. 이걸 읽은 웨인 왕 감독은 도시 한복판에서 저마다 상처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스모크’에 담아냈다. 이 영화는 199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폴 오스터의 작품은 매년 음미해도 새로운 맛을 낸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집에서 홀로 성탄절을 맞는 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썽꾸러기 손자는 무슨 일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을까. 그 부모는 어쩌다 이런 궁핍의 골짜기에 내팽개쳐졌을까. 어딘가에 살아 있기는 한 걸까. 이런 질문을 하나씩 되새기는 동안 우리는 모두 담뱃가게 주인 오기 렌이 되고, 폴 오스터나 웨인 왕이 되며, 눈먼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숭례문 도안 '한국실' 90주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또 생각나는 게 있다. 130년 전 조선에 와서 2대에 걸쳐 의료 선교에 헌신하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힌 셔우드 홀 가족 이야기다.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돌잔치 때 장난감 등 다른 물건은 제쳐두고 청진기를 집었다. 젊은 여의사로 조선 땅에 온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은 기뻐하며 아들이 의료 선교사가 되길 기도했다.

그런데 2주일 후, 어머니는 평양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말라리아와 이질을 치료하다 감염된 것이다. 결혼 2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남편을 기리는 기홀병원과 여성 전용 광혜여원, 평양외국인학교 등을 세웠다.

셔우드 홀은 평양외국인학교를 거쳐 미국 마운트 유니언대학과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돼 돌아왔다. 대학 시절 만나 함께 온 아내도 의사였다. 셔우드 홀은 아내와 함께 황해도 해주에 해주구세요양원이라는 국내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병원을 설립하고 질병 퇴치에 전념했다.

병원만 운영한 게 아니라 농장을 만들어 건강식을 제공하고 환자의 사회 복귀까지 도왔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20명에 1명꼴인 결핵 사망자가 한국에서는 5명 중 1명이나 되는데 이는 결핵을 불치병으로 여기고 겁내면서 치료를 포기하기 때문”이라며 “치료뿐 아니라 계몽과 교육을 위해서도 전문 요양원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기에는 큰 비용이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국내에 ‘크리스마스실’을 도입했다. 1932년에 그가 처음 발행한 실은 숭례문을 도안으로 삼은 것이었다. 숭례문의 단단한 벽으로 질병을 막겠다는 상징 의지를 담았다. 몇 년 뒤에는 농아 출신인 운보 김기창 화백도 도안에 참여했다.

이렇게 치료와 모금, 계몽을 위해 실을 만든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힘쓰던 그는 1991년 캐나다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해 타계한 아내와 함께 서울로 옮겨져 부모가 묻힌 양화진 묘지에 합장됐다.

그가 90년 전에 처음 만든 조선의 크리스마스실은 6·25전쟁이 끝난 1953년 다시 살아나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올해 실의 모델은 월드컵 대표 주장인 손흥민 선수다. 모금 목표를 30억원으로 잡았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 모였는지 궁금하다. 벌써 사흘 뒤면 크리스마스이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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