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을 빚어낸 흙의 예술…보르도 와인에 취해요

입력 2023-03-02 17:27   수정 2023-03-03 02:31


전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는 어디일까? 이 질문엔 대부분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떠올린다. 미국의 나파 정도가 역량에 있어 이들과 견줄 수 있겠으나, 역사와 전통까지 고려한다면 역시 보르도와 부르고뉴로 좁혀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와인의 맛과 향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와인 러버의 여행에 볼거리와 즐길거리까지 포함하려 한다면 이번엔 부르고뉴가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내륙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방문객을 위한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다. 여행 인프라는 역시 나파 쪽이 좋긴 하나 세련되게 준비된 포도원 투어 프로그램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옛 영광을 간직한 보르도는 나파를 비롯해 신대륙의 패기 있는 여러 도전자들과의 방어전을 펼쳐왔다. 비록 과거에 비해 노쇠해져 있다곤 하나 여전히 건재한 관록의 디펜딩 챔피언이다.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고, 강과 바다도 있고, 사막도 있다. 진짜다.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를 가면 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지롱드강을 따라 좌우에 포도원과 양조용 포도밭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지롱드강의 강폭은 수㎞가 넘을 정도로 커서 바다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넓은 강폭이 보르도를 역사적으로 전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로 만들었다. 철도와 포장도로가 발명되기 전까지 양쪽 강변을 따라 생산된 와인들은 해로에 의존해 유통됐다. 대서양과 연결돼 있으며, 동시에 큰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폭의 지롱드강을 가진 보르도는 과거 와인의 최대 소비국이었던 영국을 공략하기에 최적인 입지였다.
보르도의 포도를 키우는 ‘흙’과 ‘물’
보르도의 지롱드강 좌안에는 마고, 생쥘리앙, 포이야크 등 유명한 와인 생산 마을이 즐비하다. 보르도 5대 포도원으로 알려진 곳들은 전부 강 좌안 마을에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찾은 곳은 강 우안 지역에서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 포므롤이다.

‘르 팡’ 포도원. 그 첫인상은 그냥 시골 동네에서 좀 잘 사는 양옥집 정도였다. 문전옥답이라고 했던가. 차 네댓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 공간의 끄트머리부터는 바로 포도밭이었다. 이 포도원의 밭으로 걸어 들어가 토양을 곰곰이 살폈더니, 이 곳 포므롤 마을과 인근의 생테밀리옹 마을의 일반적인 토양과는 꽤 다르다. 이 지역의 포도밭 토양은 대체로 자갈과 진흙이 기본 구성인데 이 집의 밭에는 모래, 즉 사토가 더 섞여 있어 더 투박해 보였다.

흙을 한 꼬집 집어서 향을 맡았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리도 말렸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버릇-흙을 입술에 살짝 올리고 그 촉감과 맛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입술의 촉감이 가장 예민하기 때문이며, 물론 다시 털어냈다. 르 팡의 흙의 촉감과 맛은 확실히 이 지역의 다른 포도원과는 달랐다. 다만 오전에 들렀던 인근의 세르탕이라는 포도원의 토양과 꽤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르 팡과 세르탕의 생산자들은 가까운 친척으로 오랜 기간 교류하며 대를 지어 농사를 지어왔다고 한다. 원래 비슷한 특성의 밭을 친척들끼리 나누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들의 의도에 의해 밭도 서로 닮아가는 것일까? 이 지역의 생산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양조용 포도 농사의 핵심은 토양 관리”라 했고, 좋은 토양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세대에 걸쳐 공을 들이고 있단다. 르 팡의 포도밭 끝자락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스마트폰의 디지털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았다. 밭은 완만하게 남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르 팡의 포도밭은 고작 2.7㏊(약 8000평) 정도다.
땅에 미친 프랑스 젊은 농부들
월드 챔피언 보르도 와인의 명성은 이런 입지적 우위만으로 쌓은 것은 아니었다. 지롱드강 우안의 작은 마을 포므롤에서 만난 양조용 포도 생산자들은 한결같이 ‘땅’에 미쳐 있었다. 포도원 세르탕의 젊은 생산자는 자기네 포도밭의 구획마다 포도의 맛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한쪽 밭을 가리키며 ‘저쪽 구획의 포도는 산미가 강해서 나중에 양조할 때 블렌딩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마치 ‘비법 양념’인 양 표현했다. 또 어떤 구획은 포도 당도가 더 높고, 또 큰 나무 바로 옆에 있는 구획의 포도는 그 나무 때문에 다른 특성이 생긴다고 했는데, 결국 핵심은 땅의 특성이고 토양의 특성이었다. 와인의 특성을 결정 짓는, 그들이 테루아(Terroir)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포므롤 마을에서 만난 이름난 생산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밭의 구획별 토양의 특성과 그 특성이 만들어내는 포도의 맛과 향의 개성까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포도 수확도 구획별로 구분해서 하고, 양조도 분리해서 진행한다. 최종적으로 이 원액을 적정 비율로 블렌딩해 해당 포도원 특유의 와인 맛과 향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밭의 구획별 특성이 와인의 주원료이자 조미료가 되는 셈이다. 와인은 결국 땅의 표현형인 것이다.
열 송이의 포도로 명품을 만들다
르 팡에서 흙을 입술에 올리며 나름대로 진지했던 나는 그날 운이 굉장히 좋았다. 평상시 만나보기 어렵다는 이 포도원의 대표 생산자인 자크 티엔퐁 씨가 지나치게 흙에 몰입 중인 한 무리의 한국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기특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우리 일행을 르 팡의 지하 와인 저장고로 안내해 소량 생산된다는 그의 와인을 맛보여 줬다. 그가 저장고에서 골라서 연 와인은 2011년에 생산된 와인이었으나 10년이 더 지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건하고 신선했다. 그에게 “이 와인, 네댓 시간 정도 공기와 접하게 한 뒤 마시면 더 맛있겠는데요?”라는 꽤 실례되는 질문을 했더니, 그는 인심 좋은 웃음과 함께 르 팡의 땅을 한 잔 더 따라주며 “함께 그렇게 상상하면서 먹어보자고!”라고 답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참 후, 한 와인 매장에서 마주치게 된 르 팡의 가격표에 내 다리는 순간 휘청였다. 이렇게 희귀하고 비싼 와인이었다고? 내 월급으론 평생 먹을 수 없는 와인이었다. 한 병의 와인 속에는 포도 열 송이가 들어간다. 대량 재배되는 양조용 포도 열 송이의 원가는 고작 500원 남짓일 터이다.

기껏해야 포도 몇 알, 기껏해야 술 한 병, 기껏해야 로테크 농산물 가공일 뿐인 와인. 그런데 그 원물의 가치를 2000배 이상 끌어올린 경이로움을 만들어낸 것은 땅과 그 땅을 일구는 농부다. 와인은 인류가 지금껏 만들어낸 최고의 부가가치 상품이다. 그리고 농부란 역시 멋진 직업이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과·푸드비즈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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