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대리인이 세운 제국에 기생하는 이사회

입력 2023-03-24 18:14   수정 2023-03-25 00:17

주인으로부터 의사 결정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딜레마’는 미시경제학의 오랜 연구 주제다. 이 문제를 기업 지배구조에 처음 접목한 학자는 마이클 젠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이제는 고인이 된 윌리엄 매클린 로체스터대 교수다. 두 교수가 1976년 발표한 ‘기업 이론: 경영자 행동, 대리인 비용 그리고 소유 구조’는 경제학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다.

젠슨 교수는 기업들이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영진(대리인)이 주주(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하려면 연봉을 얼마나 주느냐보다 어떻게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전 세계 기업들의 보상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한국의 지배구조 논의는 ‘주인(주주)-대리인(경영진) 관계’보다 ‘주인(최대주주)-주인(소액주주) 관계’가 중심이었다. 주주가 분산돼 있는 미국 기업들과 달리 한국은 최대주주가 직접 경영하는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KT, 포스코, KT&G, 금융지주사 등 특정 최대주주가 없는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주인-대리인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 소유분산기업의 경영자는 대부분 회사에 젊음을 바친 애사심 넘치는 엘리트들이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리더 자리를 꿰찼을 만큼 능력도 뛰어나다. 회사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이들 경영자의 진심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리인과 주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이해 상충이 존재한다’는 젠슨·매클린 교수의 가설을 뒤집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이들이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는 점에서 가설의 유효성을 증명하는 생생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은 경영진이 회사 자원을 주주 가치보다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대리인 딜레마의 고전적 유형이다. ‘제국 건설자’들은 시너지가 분명치 않은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회사 덩치를 키우고 우호 세력을 확보하는 데 회사의 현금을 활용한다. 경영진에 비해 정보가 부족한 일반 주주들은 이런 의사결정이 주주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예컨대 KT가 신한금융지주, 현대자동차 등과 지분을 맞교환하는 데 1조원 넘는 돈을 사용한 것이 진짜 주주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는지 검증하는 시스템이 한국에는 없다. 전략적 동맹을 위한 지분 교환이라고 하지만 우호 지분을 통해 ‘가공의 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란 비판적 시각도 적지 않다.

사내 우호 지분이 11%에 달하는 KT&G는 또 어떤가? KT&G복지재단, KT&G장학재단이 보유한 자사주가 약 3%에 달한다. 이 재단들의 이사장은 전·현직 CEO가 맡고 있다. 우리사주조합과 사내 공제회, 각종 기금도 표 대결에서 회사 편을 들어줄 우호 세력이다. 대리인들이 돈 한 푼 안 들이고 주인 행세를 하는 신묘한 제국 건설 기법이다.

대리인을 견제하는 역할은 이사회가 맡아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사외이사들은 따뜻한 제국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한다. CEO들은 자신이 선임한 사외이사를 통해 제국의 요새를 더욱 공고히 쌓는다. 심지어 퇴임 이후에도 사외이사를 추천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사외이사들은 제국이 제공하는 특권과 혜택을 누리며 주인인 주주가 아니라 대리인들에게 충성한다.

이런 측면에서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를 바로잡고 ‘이권 카르텔’을 깨야 한다는 정부와 여권의 공세는 설득력이 없지 않다. 다만 논의의 초점이 좀 더 주주 가치에 맞춰져야 한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간 기업 CEO 선임을 두고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주주를 대신해 대리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은 어쨌든 정부가 아니라 이사회가 맡아야 한다. 그게 대한민국이 선택한 주주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다. 이를 위해선 이사회의 책무를 재정립해야 한다. 현행 상법은 이사회가 ‘회사에 대해’ 충실 의무를 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사회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의 이익’을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은 지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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