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사무친 이방인…고향에 대한 향수로 완성한 '샤갈 화풍'

입력 2023-03-30 17:10   수정 2023-04-29 18:45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중략)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한국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의 지형과 마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된 시어에는 그가 타향살이하면서 느낀 상실감과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처럼 고향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예술가의 작품 세계와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술에서는 러시아 출신 유대계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이 향수를 주제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품 ‘나와 마을’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잘 표현된 걸작으로 꼽힌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HW 잰슨은 샤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고향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에서 샤갈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되살린다. 그것은 샤갈에게 너무나 중요한 경험이어서 그의 상상력이 기억을 지우지 않고 형성하고 재구성했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 벨라루스의 비텝스크 하시딕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23세에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이후 타국에서 망명자로 살면서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 1940년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샤갈은 “모든 화가는 어디선가 태어납니다. 그가 나중에 다른 환경의 영향을 받더라도 어떤 본질, 즉 출생지의 특정한 향취는 그의 작품에 깊게 새겨져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와 마을’은 샤갈이 20세기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유학하던 때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자전적 작품이다. 당시 샤갈은 현대미술을 주도한 입체주의, 야수주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했지만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향수에 젖어 들곤 했다. 샤갈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이 그림은 러시아 풍경과 민간 설화, 유대인 공동체의 생활상과 민속, 종교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구도와 구성 방식에서는 그가 파리에서 탐구하던 입체주의 양식 영향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 오른쪽에 모자를 쓰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녹색 얼굴의 남자가 입을 살짝 벌린 채 꿈꾸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샤갈이다.

화가는 왜 자신의 눈을 흐릿한 파란색으로 표현했을까.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고향에 대한 지리적 단절감과 절절한 그리움을 흐릿한 파란색 눈빛으로 대신 말하는 것이다. 화면 중앙 왼쪽에는 인간처럼 화려한 목걸이를 한 염소(또는 소)가 샤갈과 마주 보고 있다. 염소 머리에는 흰색 구름이 깔린 파란 하늘과 마을의 전형적인 젖 짜는 장면을 그린 이미지가 중첩돼 표현됐다.

그림을 자세히 살피면 화가와 염소의 눈동자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흰색 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인격화된 동물, 인간과 동물의 눈동자 사이를 연결한 선은 두 생명체 간의 유대감과 상호 의존성을 의미한다. 실제로 샤갈의 고향에서는 농부들이 가축을 한 식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화가와 염소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공간에는 태양, 달, 지구를 암시하는 큰 원과 일식 현상으로 보이는 작은 원, 원의 하단 삼각형 안에는 생명의 나무를 상징하는 꽃이 핀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샤갈의 손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유대 신비주의 하시디즘(Hasidism) 영향을 받은 샤갈이 모든 사물에는 신이 현존하고 인간과 동식물, 우주는 유기적 공동체로 연결됐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그런 그의 종교관이 이 그림에 반영됐다고 해석한다.

한편 대각선을 활용해 색 면을 나눈 방사형 구도와 기하학적 배치는 대상의 형태를 분할하고 조합한 입체주의 기법에서 빌려온 것이다. 동유럽적 주제와 서유럽 현대회화 기법의 결합, 동화적 상상력은 샤갈 화풍의 주요 특징으로 꼽힌다. 화면 맨 위 배경에는 비텝스크 하시딕 유대인 마을의 전통 집과 교회, 마을 주민이 보인다. 그런데 교회 종탑 아래 공간에는 커다란 얼굴이 길거리를 내다보고 있고 집 두 채와 여자는 거꾸로 서 있다.


다음 작품 ‘도시 위에서’에서도 나타나듯 샤갈의 그림에서는 날아다니거나 거꾸로 된 인물과 사물이 자주 등장한다. 화가에게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된 마법의 세계를 그리는 이유를 묻자 그는 “위대한 예술은 자연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나는 종종 사물이 ‘느끼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대답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서 되살린 자전적인 이야기와 고향에 대한 향수, 유대인 공동체의 전통과 민족적 정서를 빨간색, 파란색, 녹색, 흰색 네 가지 주조색을 사용해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구현한 이 작품은 고향이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례를 제공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