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지붕 틈새로 비춘 햇살…소년은 '희망을 짓겠노라' 다짐했다

입력 2023-04-13 17:41   수정 2023-04-28 09:35


1956년 증축 공사가 한창인 일본 오사카의 한 서민 주택. 목수가 지붕을 잘라내자 답답하고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구질구질한 일상에 한 줄기 희망이 비치는 것처럼. 소년은 생각했다. “집을 짓는 사람이 되겠다.”

소년의 이름은 안도 다다오. 그가 택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트럭 운전과 공사장 막일로 생계를 이었다. 헌책방에서 산 책으로 건축을 독학했고, 빈털터리로 세계를 떠돌며 명작 건축물들을 답사했다. 1969년 건축연구소를 설립한 뒤에도 고졸이란 이유로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천신만고 끝에 설계를 따내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했고, 거듭 결과물을 쌓아 1995년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2014년 암 선고를 받으며 다시 절망했다. 장기를 다섯 개나 들어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82세. 하지만 “나는 아직도 청춘”이라고 안도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난달 강원 원주 뮤지엄산에서 열린 건축전 개막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랬다. 안도의 지난 50여 년간 건축사를 총망라하는 이번 전시에는 그가 살아온 청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표 출품작들을 키워드 다섯 개로 압축해 안도의 작품세계와 그의 삶을 풀었다. 방한 강연 내용과 기자간담회 발언,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된 안도의 평전 <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도 함께 담았다.
(1) 노출 콘크리트


가로 3.6m, 세로 14.4m의 좁은 땅에 콘크리트로 벽을 세운다. 내부 공간은 3등분해 좌우에는 방을, 가운데에는 하늘이 보이는 정원과 통로를 만든다. 노출 콘크리트인 데다 외부 공기에 바로 노출돼 있으니 단열이 형편없다. 비가 오는 날 집안을 돌아다니려면 우산을 써야 한다. 이 불편하고 이상한 집은 안도가 오사카에 지은 초기 대표작 '스미요시 주택'(1975~1976)이다. "도시에서도 자연과 숨쉴 수 있어야한다. 살기에는 좀 힘들어도, 나에게 설계를 맡긴 이상 강인하게 살겠다는 각오를 해주기 바란다."

다행히도 건축을 맡긴 노부부는 작품에 만족했고, 지금까지도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을 계기로 안도는 건축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안도=노출 콘크리트'라는 공식도 이때 생겼다.
(2) 빛

1965년 빈털터리로 유럽 건축 답사를 하던 안도는 프랑스 동부의 시골 마을 롱샹에 발을 디뎠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각양각색의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은 곧 희망이다. 학교는 나오지 않았어도 희망이 있는 건축을 하고, 희망이 있는 인생을 보내겠다.' 안도는 생각했다.

오사카 교외 주택가에 1989년 준공한 빛의 교회는 이때 얻은 영감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어두운 예배당 공간을 밝히는 건 오직 십자가 모양의 틈에서 쏟아지는 햇빛뿐. 내부는 수평이 아니라 극장처럼 앞으로 경사져 있다. 이곳에서 교인들은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낀다. 안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걸작이지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만이 하나 있다"고 했다. "저 십자가 부분을 완전히 뚫어두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춥다면서 유리를 끼워버렸어요. 언젠간 제가 꼭 빼버릴겁니다."
(3) 자연

노출 콘크리트로 금욕적이고 강인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던 안도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풍경과의 조화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1988년 홋카이도에 완공한 '물의 교회'는 그 전환점으로 꼽힌다. 예배당에 앉은 사람들은 인공호수에 떠 있는 십자가와 그 너머 그림 같은 숲 풍경을 보게 된다. 나오시마 섬에 있는 지중미술관 등의 건축물들도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됐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뮤지엄산 역시 자연과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공간이다. 노출 콘크리트, 빛, 물, 돌과 함께 주변 자연 풍경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안도는 "2005년 고(故) 이인희 한솔문화재단 이사장이 이곳에 미술관을 짓고 싶다 했을 때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사실 마뜩잖았다"며 직접 부지를 둘러본 뒤 '별천지를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4) 전통과 현대


2000년대 이후 안도의 건축에서 두드러지는 주제가 '전통과 현대의 조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옛 세관 건물을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푼타 델라 도가나'가 대표작이다. 안도는 이 건물 전체를 15세기 때 모습으로 복원한 뒤 중앙에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공간을 하나 만들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했다. 프랑스 파리의 '브르스 드 코메르스'도 마찬가지.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 높이 10m, 직경 30m의 콘크리트 원통을 넣었다. 안도는 "돈이 엄청 많이 들었지만, 남의 돈이니 상관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5) 청춘

안도는 최근 몇 년 새 공공 건축에 매진하고 있다. 2019년 오사카에 지은 '나카노시마 어린이 책 숲 도서관'은 안도가 제안해 설립된 건물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인근 도로까지 인도로 바꿨다. 안도의 명성과 영향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난해 서울 마곡동에서 개관한 LG아트센터도 공익성이 강한 건축이다. 안도는 "LG가 민간 기업인데도 공익을 강하게 추구한다는 점에 감명받았다"며 "많은 시민이 감동을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했다. 이번 방한 때도 안도는 직접 마곡에서 건물을 둘러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안도는 요즘도 하루 1만 걸음을 걷고, 한두 시간씩 공부를 한다고 했다. "건축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고 싶습니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겠어요.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니까요.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는 청춘입니다." 안도가 미술관 곳곳에 설치한 푸른 사과 조형물은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시는 7월 30일까지.

원주=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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