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슴한 평양냉면처럼…클래식이란, 음악의 미세함을 알아가는 것

입력 2023-05-03 17:56   수정 2023-05-04 02:43

계절이 바뀌니 점심시간이면 평양냉면 맛집에도 줄이 조금씩 길어진다. 간만에 유명 냉면집에 들러 육수 한 방울까지 ‘완냉’을 했다. 한 끼 점심값치고는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슴슴하고 나쁘게 말하면 별맛도 느껴지지 않는 이 국수에, 왜 어떤 사람들은 열광하고 또 논쟁을 일삼을까?

인기 예능프로그램 ‘유퀴즈’에 ‘누들로드’ 등 음식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이욱정 PD가 출연한 적이 있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가장 맛있게 먹은 국수 요리가 뭐냐’고 묻자 이 PD는 ‘평양냉면’이라고 답했다. 두 진행자가 격하게 맞장구치더니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처음에 평양냉면 맛있다고 하는 사람 보면 허세인 줄 알았어요.”(조세호)

“처음 먹어봤을 땐 맛이…뭐랄까, 이상하더라고요. 입문하는 데 적응기가 필요하죠.”(유재석)

“사람들이 ‘세 번만 먹어봐라. 그러면 제 발로 찾아갈 것이다’ 그러던데, 진짜 딱 세 번 먹고 나니, 와… 술 마신 다음 날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조세호)

“확실히 그 감칠맛이 뭔가 중독성이 있죠? 맛의 발견은 그 미세함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에요.”(이 PD)

클래식 음악 마니아라고 소문이 나다 보니 종종 ‘클래식 음악이 왜 좋으냐, 뭐가 매력이냐’ 등의 질문을 받는다. 위에 옮긴 대화에서 ‘평양냉면’ 자리에 ‘클래식 음악’을 넣으면 그대로 나의 대답이 된다. 처음엔 ‘뭐 이런 졸린 음악이…’ ‘저런 음악 좋아한다는 건 허세 아냐?’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익숙해지는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어느 날 갑자기 베토벤 현악사중주의 한 대목이 사무치게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클래식 음악만의 미묘한 감칠맛이 뭔지 모를 중독성이 있다고나 할까. 라면, 짜장면, 짬뽕, 칼국수에 없는 매력과 맛의 변주가 평양냉면의 슴슴함 속에 숨어 있듯, 전기적 증폭을 거치지 않은 클래식 음악 속에는 가요나 팝, 록 등의 대중음악과는 또 다른 떨림과 울림이 있다.

수백 년 서양 문화의 정수를 간직하며 변화·발전해온 만큼 할머니 장맛보다 깊은 속 맛이 있다. 평양냉면의 맛을 내는 레시피는 다양하다. 국수 면발에 들어가는 메밀과 전분의 함량을 어떻게 배분하는지, 소·돼지·닭·꿩고기를 어떤 비율로 해서 육수를 내는지, 동치미 국물을 섞는지 등에 따라 상당히 다른 맛과 모양의 냉면이 나온다. 클래식 음악도 비슷하다. 같은 악보를 놓고 연주해도 악기들의 소리 밸런스를 어떻게 잡는지, 리듬과 템포와 강약의 흐름을 어떻게 잡아 나가는지 등에 따라 다른 느낌의 연주가 나온다. 알면 알수록 이런 차이가 더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도 평양냉면과 클래식의 공통점이다. 냉면 잘 아는 사람들은 육수의 빛깔, 면에 얹은 고명 등 사진만 보고도 어느 냉면 맛집인지 알아맞힌다. 클래식 마니아들도 어떤 유명 곡의 연주를 듣거나 영상을 보면 그게 베를린필인지 빈필인지 맞히곤 한다.

평양냉면 안 먹고 살아도 인생에 지장은 없지만 가끔 평양냉면 맛집을 찾아다니면 인생은 좀 더 풍요롭고 맛있어진다. 내가 몰랐던 것에서 맛과 멋을 깨닫는 즐거움, ‘그게 그거’ 같은 것에서 차이를 분별해내는 재미를 알아가다 보면 노화로 인한 인지능력 퇴보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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