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는 존재는 없단다"…어른이들 위로하는 '몽실언니' [책이 머무는 집]

입력 2023-05-11 18:23   수정 2023-05-12 10:10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냄새나고, 사람들이 곁에 다가가기조차 꺼리는 존재. 1996년 출간된 그림책 <강아지똥>은 그런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강아지똥은 길 위에 덩그러니 버려진 채 태어났습니다. 새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데 “에그, 더러워!” 질색하며 도망가버려요.

강아지똥은 옆에서 자라고 있는 민들레 새싹이 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정작 민들레는 강아지똥의 도움이 필요하죠. 어느 비 내리는 날, 강아지똥은 기꺼이 빗물로 자신의 몸을 부숴 거름이 됩니다.

이야기에는 이런 풍경이 그려집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어린이를 위한 책이라는데 어른이 된 후에 더 자주 생각나는 책들이 있습니다. 권정생 작가의 <강아지똥>도 그런 이야기예요.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취업준비생, 사무실에 놓인 강아지똥이 된 것만 같은 신입사원….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말하는 이 그림책은 세상살이에 지친 ‘어른이’에게도 잔잔한 위로를 건넵니다.

어린이날을 맞아 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자리잡은 권정생어린이문학관을 찾아갔습니다. 계획이 다 있었죠.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문학관’ 정도로 소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권정생 작가는 국내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존재니까요.

게다가 문학관은 폐교된 일직남부초교 건물을 고쳐서 전시실 등을 꾸몄거든요. 어린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너른 운동장에 놀이터도 있고요. 안동역이나 안동터미널에서 문학관까지 찾아갈 대중교통편이 편하지는 않은 게 흠이라면 흠이죠. 그래서 기사에 ‘자동차로 이동하는 게 편하다’는 설명을 한 줄 넣어야겠다고 메모했어요. 거리가 제법 있어도 같은 안동이니 이육사문학관이나 하회마을을 함께 둘러볼 법하다는 생각도 했죠.

문학관을 둘러본 뒤에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인간 권정생, 어른 권정생을 소개하고 싶어졌어요. 전시실에 재현된 권 작가의 흙벽집을 보면서요.

권 작가는 1937년 도쿄 시부야 빈민가에서 징용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5남2녀 중 여섯째. 거리 청소부인 아버지가 쌓아둔 헌책을 읽으며 글자를 익혔어요. 여덟 살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집이 불타 사라지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가난 때문에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어요. 1947년, 그러니까 권 작가 열한 살 무렵에 일직면 조탑리에 식구들이 모여 소작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다시 김천 상주 문경 등 경북지역을 떠돌며 지냈고요.


훗날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가난과 폐결핵, 신장결핵에 시달리면서도 작가의 꿈을 키웠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틈틈이 써뒀던 동시 98편을 모아 20대 때 <동시 삼베 치마>라는 동시집을 손수 만들었습니다. 일직교회 종지기로 문간방에 지내며 쓴 동화 <강아지똥>이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 현상모집에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몽실언니> <엄마 까투리>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 동심(童心)을 아름답게 표현한 책들을 펴냈습니다. <몽실언니>는 6·25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고 <엄마 까투리>는 산불 속에서 엄마 까투리가 목숨을 바쳐 자식들을 지키는 내용이에요.

국내 대표 아동문학 작가가 된 뒤에도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1983년 마을 청년들의 도움으로 빨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26㎡짜리 흙벽집을 지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아이들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이 집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언젠가 시인 김용락은 윤석중 시인이 이 집을 방문한 일화를 전해 듣고 시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6’을 쓰기도 했어요. 윤 시인이 직접 찾아가 전달한 새싹문학상 상패와 상금을 권 작가는 한사코 거절했다죠.

‘권 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뭐 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어른들끼리 주고받니껴?/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중략)/다음날 이른 오전/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나는 백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가난한 아이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한 그는 2007년 세상을 떠나며 인세를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세워졌고, 지금까지 북한 어린이 지원 등 어린이를 위한 공익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가 한 자 한 자 손글씨로 미리 써둔 유언장에서는 가식 없는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인세를 관리해줄 세 사람을 지정하면서 이런 설명을 달았죠. “최완택 목사.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정호경 신부.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이다.”

5월 17일은 “만약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던 그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그는 유언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그가 바라던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 외로운 어린이가 없는 세상, 환생을 꿈꿀 법한 세상은 언제쯤 올까요.

안동=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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