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무릅쓰고 '스크러버 장착 초대형선' 승부수 띄운 이유 [유창근의 육필 회고]

입력 2023-05-19 09:30   수정 2023-05-25 09:29


신조 선박 규모와 척수가 정해진 후 주요 사양 중 결정해야 할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가 2020년도 시행 예정이었던 아황산가스(SO²) 규제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대응책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첫째 옵션이 저유황유를 사용하는 것, 둘째 옵션은 스크러버(Scrubber)를 장착하는 것, 세 번째 옵션이 액화천연가스(LNG) 엔진을 장착해 연료를 LNG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중 스크러버는 연료 연소시 나오는 아황산 분진을 바닷물로 씻어내는 장치다. 아황산 농도를 0.5% 이내로 줄인 비교적 비싼 저황유 대신 기존 연료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초기 투자비를 감안하더라도 가장 경제적인 옵션이었다.

마지막까지 고심을 거듭했던 것은 LNG 연료 선박이었다. 기존 연료에 비해 아황산가스 90%, 이산화탄소 20%, 질소(NOx) 80% 저감 효과가 있으나 초기 투자 비용이 아직 높았다. 전 세계적으로 급유 시설이 부족하며 LNG 가격 변동성 등의 경제적 이유와 화재시 안전성 문제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내가 처음 스크러버를 접한 것은 2013년 9월 현대상선 사장 자격으로 참석한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박스 클럽 회의에서였다. 물론 당시에는 대표들 간 정보 교환 차원에서 나눈 대화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이 장치는 3년 후인 2016년 10월 국제해사기구(IMO)에서 아황산가스를 2020년부터 규제하겠다고 결정해 발표한 후, 인천항만공사 사장을 거쳐 현대상선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기 한진 사태를 수습하고 2M과의 얼라이언스 계약을 매듭지을 무렵 나는 임기택 IMO 사무총장과 앤디 케이스(Andy Case) 클락슨(Clarkson)사 사장을 방문했다. 2020년 아황산가스 규제 시행 여부를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앞서 환경 관련 규제의 일환으로 IMO에서 결정해 2017년 9월 시행하려던 선박평형수 처리설비(BWTS) 의무 탑재가 일부 선박에 대해 유예되는 전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수조원의 투자가 빛을 발하려는 순간 규제 시행이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 방문으로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은 나는 그해 10월 JOC(Journal of Commerce)의 TPM(Trans-Pacific Maritime) 행사에서 현대상선의 초대형선 발주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2020년 초대형선 투입에 대비해 2018년 초부터 유럽 시장 영업력 확장을 위해 독자 서비스를 개설하고 화주 접촉 빈도를 늘려나갔다.

또한 선박 발주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국내 조선 3사에 건조 제안서를 요청, 이들로부터 제안서를 접수해 협상을 거쳐 초대형선 20척의 조선사를 결정했다. 대우해양조선 2만4000TEU급 7척, 삼성중공업 2만4000TEU급 5척, 현대중공업 1만6000TEU급 8척으로 조선 3사에 나눠 발주했으며 2018년 9월28일 조선 3사와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초대형선이 발주됐다 해도 세계 최대의 선박을 사고 없이 운항할 인력이 필요했다. 2020년 에버그린 소속 초대형선의 수에즈 운하 좌초 사고에서 보듯 초대형선 운항에는 중소형선보다 훨씬 높은 위험성이 상존한다. 당시 해사본부를 맡고 있던 최종철 상무와 교육팀, 한국 해운의 자부심인 선·기장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지금까지 무사고 운항을 지속하고 있다. 초대형선 투입 후 안전 운항을 계속해온 선·기장 여러분께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얼라이언스 관련 사항은 글로벌 선사의 최고경영진들이 가장 신경 쓰는 업무 중 하나다. 얼라이언스 협력이 선사 업무의 모든 부분과 연관돼 있어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얼라이언스 멤버들은 보통 5년 협력 계약을 체결하는데, 매년 협의를 통해 각사 투입을 원하는 선박과 항로별 희망 선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항로를 정하며 선사별 투입 선박 및 연간 운영 선복을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2018년에 나는 2020년 초대형선 투입을 대비한 유럽 영업력 증대를 위해 유럽 지역을 6번 이상 방문했다. 얼라이언스 건도 방문 목적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2M과의 협력이 종료되는 2020년 3월 이후를 대비해 얼라이언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얼라이언스는 선두권의 한 두 선사를 제외하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적인 것이 됐다.

선사의 성장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자가 성장(Generic Growth), 즉 자체 능력으로 선대와 항로를 넓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선사를 인수·합병하는 방식, 즉 M&A를 통한 성장이다.

머스크의 경우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급성장했다. 2010년대 들어 MSC와 2M 얼라이언스를 결성해 운영하고 있으나 독자 운영이 가능한 대형 선사의 협력인 경우 서로의 이해관계로 사사건건 부딪쳐 협력 효과가 반감하는 경우를 2M과 협력하면서 목격했다. 그로 인해 현대상선이 간접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었다, 최근 발표된 2M의 협력 결렬 선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 다른 마지막 성장 방식은 얼라이언스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가 성장이 힘들어지고 홀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마음에 맞는 파트너와 결성해 협력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단독 운항시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빠른 성장을 원할 때나 특정 지역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 할 때 파트너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등 제약 조건이 있다는 게 단점이다.

우리나라 컨테이너 선사의 얼라이언스 역사를 보면 1997년 현대상선이 당시 미국 APL, 일본 MOL(Mitsui OSK Line)과 함께 ‘TNWA(The New World Alliance)’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글로벌 선사의 입지를 굳혀 나아갔다. 또 한진해운은 2011년 중국 코스코, 일본의 K 라인, 대만 양밍(Yang Ming)과 함께 CKYH 얼라이언스를 결성했다. 일본 NYK, 독일 하팍로이드(Hapag Lloyd), 홍콩 OOCL, PONL(영국 P&O와 네덜란드 Ned Lloyd의 합작회사)이 형성한 그랜드(Grand) 얼라이언스와 함께 세계 3대 얼라이언스 체계를 구축했다. 이때까지는 머스크·MSC·CMA-CGM·에버그린 등은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2010년대에 들어선 독자 운영해 오던 머스크와 MSC가 2M 얼라이언스를 결성했다. CKYH 얼라이언스는 에버그린이 가입해 CKYHE 얼라이언스가 됐다가 2016년 한진해운이 G6 얼라이언스로 옮겨가면서 코스코, 에버그린, CMA-CGM이 오션(OCEAN) 얼라이언스를 결성 진화했다.

한편 2011년 TNWA 3사와 그랜드 얼라이언스의 생존자인 NYK, OOCL, 하팍로이드(PONL은 머스크에 합병됨)를 포함해 총 6개 선사가 G6 얼라이언스를 결성했으나 2015년 말 APL은 CMA-CGM에 합병됐다. 이후 현대상선이 G6 얼라이언스에서 퇴출되고 한진해운으로 교체됐지만 한진 사태로 남은 5개 선사가 디(The) 얼라이언스라 불리는 협력체를 결성 운영하다 2019년 HMM을 다시 받아들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시 2018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에는 2M과의 협력 종료까지 2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타 얼라이언스와의 접촉은 뒤로 하고 우선 2M과 접촉해 초대형선 이슈를 매듭짓고 2020년 이후 더 큰 틀의 협력을 이끌어내기로 했다. 2M이 현대상선의 초대형선 건조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 [대한민국 해운강국의 길 - 유창근 전 HMM 대표 육필 회고] 9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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